지난해 정부 각 부처에서 규제 50% 철폐를 목표로 작업했을 때의 일이다.

재정경제부 K과장은 "불필요한 규제는 공무원의 보신주의 때문에 있는 것"
이라고 잘라 말했다.

자신이 담당하는 업무에서 불미스런 사건이 터질까봐 미리미리 온갖 방어막
을 처뒀다는 뜻이다.

공무원들이 그동안 "철밥통"으로 불려온 것도 이런 업무행태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공무원들은 범죄행위만 저지르지 않으면 정년때까지 밀려날 걱정이
없었다.

전직 공무원 뒷봐주기도 마찬가지다.

올초 정부산하기관장에서 모 협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P씨.

옛 재무부에서 1급으로 옷을 벗은 이후 6년동안 시중은행장과 산하기관장을
한 것도 모자라 또다시 영전한 케이스다.

하지만 이런 "철밥통"이 깨지고 있다.

"작지만 국민에 봉사하는 정부"라는 취지에 맞게 정부조직의 군살빼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미 정부는 지난해 1차 조직개편때 일반직 국가공무원 16만3천여명중
10.9%인 1만7천6백명을 2000년까지 줄이기로 했다.

2차 조직개편이 이뤄지면 올해 줄어드는 공무원수는 당초 6천4백명에서
1만명 수준으로 늘 것으로 행정자치부는 보고 있다.

특히 1월말 현재 보직을 못받고 남아 있는 1천5백53명은 1년간의 유예기간
동안 보직을 받지 못하면 옷을 벗어야 하는 처지다.

덧붙여 정년축소나 보직별 계급정년제 도입이 검토되고 있어 이래저래
공무원을 불안케 하고 있다.

공직사회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은 이것만이 아니다.

능력보다는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인사관행과 서비스를 제공하기보다는
민간 위에 군림했던 업무방식도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말 농림부에서는 놀랄만한 인사가 있었다.

행정고시 17회 출신인 안종훈 기획관리실장(1급)의 임명이다.

다른 부처는 기껏 14회 이상이 1급이다.

당시 김성훈 농림부장관은 "능력위주의 발탁인사를 단행했다"고 말했다.

으례 때가되면 연공과 서열에 맞게 승진했던 관행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김대중 정부의 개혁성향에 맞게 인사파괴는 각 부처에서 경쟁적으로
추진되는 추세다.

공무원의 직업관이나 생활태도도 따라서 바뀌고 있다.

산업자원부의 K사무관은 업무가 끝나기 바쁘게 강남의 한 학원으로 달려
간다.

"학위라도 하나 따야지 경쟁력을 인정받는 분위기가 됐다. 물론 공직이
민간에 개방된 만큼 이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변화하는 분위기에 맞춰 능력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얘기다.

내년부터 본격화되는 연봉제와 성과급제도 관료들의 자기개발 붐을
부추키고 있다.

공무원들이 변화를 실감하는 또 다른 분야는 줄어든 파워.

재경부 Y과장은 "사무관 시절때만 해도 금융기관장이 업무협조를 요청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이사급을 상대한다"고 말했다.

재경부가 예산이나 금융감독권한을 뺏긴 탓도 있지만 과거와 같이 군림하는
공무원은 이젠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얇은 월급봉투다.

경제부처의 한 6년차 사무관은 "얼마전 연소득이 2천만원 미만인 근로자를
상대로 한 장기우대저축에 가입했다. 그때 은행창구 직원이 아직도 이런
상품에 들 수 있어서 좋겠네요 라고 말할 때 쓴웃음이 나왔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결국 권위와 위상은 떨어지고 박봉에 시달리면서 냉혹한 경쟁의 밀림속에
던져진 것이 요즘 공무원의 신세다.

재경부 L과장은 "남은 것은 국가의 중대사를 다룬다는 긍지 하나뿐"이라며
"이대로 가다간 공직을 민간에 개방하기 전에 먼저 공직자들의 탈출 러시가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 다른 과장은 "공직에 몸담은 이상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신 정권이 바뀔때마다 흔들지만 말라"고 주문했다.

지금 과천관가에선 격변기에 적응하려는 공무원의 몸짓이 각양각색이다.

< 김준현 기자 kimj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