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이끌어갈 사상은 무엇인가.

대립과 갈등의 20세기가 끝나가면서 냉전 이데올로기는 이제 역사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카오스" "복잡계"등 새로운 시각으로 현실세계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려는 이론들이 나왔으나 하나의 사상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런 가운데 영국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보완해 내놓은 "제3의 길"이 국내외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유교사상도 아시아적 가치논쟁을 불러 일으키며 재조명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혼란기에 국가의 좌표를 제시했던 다산사상이 재조명받고
있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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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길"은 정치적으로 중도좌파적 실용주의 노선을 택하고 경제적으로는
무한경쟁으로 인한 시장경제의 폐단을 막기 위해 정부가 적절히 간여하는
신혼합경제를 추구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한마디로 "유토피아적 현실주의"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의 경직성과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극복할 새로운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제3의 길"이 인기를 끈 이유는 신자유주의 물결속에서 시장경제 논리와
시민적 연대, 정의의 원리를 결합하려는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

기든스는 제3의 길을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재생과 성공으로 가는 길"로
파악하면서 "단순한 좌우의 타협이 아니라 중도 또는 중도좌파의 핵심적
가치를 위해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화와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좌우 이념대립을 극복하고 실사구시 관점에서 국가와 경제, 시민사회의
관계를 탄력적으로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그의 이론중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역동적인 정부를 역동적인 시장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국가의 시장개입을 너무 강조했던 구식 사회민주주의나 모든 것을 시장의
결정에 맡기자는 신자유주의를 동시에 뛰어넘으려는 시도다.

좌.우파의 장점을 동시에 융화시켜 승수효과를 얻자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정부기구의 몸집을 줄이고 효율성을 극대화할 것과
시민사회의 재구성, 규제완화및 민영화를 통한 신혼합경제체제 구축을
주장한다.

또 인적자원 개발과 위험사회에 대한 처방으로 복지체제를 개편할 것,
친환경적 생산력을 키울 "성찰적 근대화"로의 전환, 세계적 민주주의를
관철할 글로벌 관할체제 확립도 제안한다.

기든스의 이같은 주장은 과연 얼마동안이나 주도적 사상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까.

그는 "신자유주의가 지난 20년간을 풍미했던 것처럼 적어도 앞으로
20년간은 제3의 길이 지배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모든 것을 국가가 통제하거나 시장기능에만 맡긴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우리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신중도좌파 정권의 목표나 정치.경제적
지향점도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클린턴 대통령까지 이 이론에 손을 들어 줌으로써 힘을
얻고 있다.

에릭 홉스봄 영국 런던대학 역사학과 교수도 "21세기의 화두를 찾는다면
중앙통제식 계획경제와 극단적 자유시장체제 사이의 균형"이라며 기든스의
견해와 궤를 같이 한다.

세계 금융계의 큰손 조지 소로스 또한 영국은행을 인수한 뒤 기든스와
가진 대담에서 "근대적 성찰성을 받아들이고 시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세계 경제를 규제할 새로운 형태의 기구를
창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크리스토퍼 피어슨 노팅엄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기든스를 절충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조차도 그의 작업이 도전적 아이디어와 도발적인 시사점들로
활기를 띠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며 그의 "탁월한 지적 작업"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제3의 길"은 아직 미완의 이념이다.

열린 사고방식과 현실정치의 간격은 여전히 크다.

따라서 비판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제3의 길" 깃발을 내세운 유럽 각국의 신중도좌파 집권은
보수주의의 장기집권에 대한 반작용일 뿐 유권자들이 새로운 이념을
원해서 생긴 건 아니라는 지적이다.

토니 주트 미국 뉴욕대 레마르크연구소장은 "제3의 길이 낙원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며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권도 대처 정권의 자연스런
산물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것이 단순한 시장경제적 처방을 뛰어넘는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공적 부문의 진공화를 초래해 국수주의가 만연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꼬집었다.

소설가 복거일씨도 "좌파의 유럽 석권은 사회주의 부활이 아니라
유권자들이 보수의 장기집권에 싫증을 느껴 생긴 오비이락"이라며
"말은 좌파처럼 하지만 정책은 중도우파"라고 분석했다.

이밖에도 "제3의 길에는 새로운 중도 좌파의 포용과 종합으로 덧칠된
낙관론이 넘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분석과 대안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고세훈 고려대교수), "서구 선진국들 내부의 긴 정치과정에 따른
결과이므로 한국적 수용에는 회의적"(이수훈 경남대교수)이라는 시각이
대두되고 있다.

문제는 "제3의 길"을 대신할 사상이나 이념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를 해석하고 활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한상진 정신문화연구원장은 "동양의 중용철학과 연계해서
제3의 길을 주체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동양의 중용사상이 "탁월한 실용주의가 될 수도 있고 보편적
철학이 될 수도 있다"며 "가장 큰 장점은 넓게 열려진 공론의 정치를
가능하게 해 준다는 점"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또 "중용의 핵심은 여러 의견을 다 듣되 합리적 중심을 택한다는
데 있으므로 개방적 공론과정과 균형잡힌 교육이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민주주의의 핵심이 열린 의사소통 구조에 있는 만큼
서양 이론을 많이 배우는 것 못지않게 동양 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서양과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물론 시류에 편승하는 기회주의가 아니라 소신있는 합리적 토론문화를
먼저 가꾸고 이를 통한 상호공존의 미래 모색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어떤 이론도 완벽할 수는 없다.

다만 대립과 갈등을 줄이고 인류 공동의 번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를 찾는 과정일 뿐이다.

결국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 중에서 어떤 것이 더 효과적인지에 대한
모색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