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협의회 최후의 날 ]]

61년 5월17일 오전 11시 반도호텔 5층 한국경제협의회 회의실에선 긴급운영
위원회가 열렸다.

회의실 공기는 무거웠고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바로 전날 새벽 군사쿠테타가 일어났으니 그럴만도 했다.

8층에 집무실을 두고 있던 장면 총리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했다.

이사회 대신 회원 참여기회를 넓히는 목적으로 새로 설치한 6개 분과위원회
의 간사 2명씩 12명의 기획위원 전원이 참석했다.

다만 전택보 부회장(천우사 사장)만 늦으리라는 사전연락이 있었다.

이날 원래 논의키로 한 안건은 1.절량농가 지원 양곡과 정치자금 거출
마무리 2.수출입링크제를 중심으로 한 수출증진책 건의 3.독일차관 및
기술협력에 의한 태백산종합계획의 구체적 추진방안 등이었다.

그러나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군사정변이 일어난 터에 이를 협의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11시 정각에 회의가 시작됐다.

어느 사이엔가 준비된 "혁명공약" 인쇄물이 돌려졌다.

누구의 제안도 없었지만 혁명공약을 축조 검토하는 형식으로 회의가
진행됐다.

기업인들답게 정세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는데는 대단히 민첩한데가
있었다.

결론은 쿠데타주도세력이 내건 주장엔 반대할 것이 없다는데 모아졌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당시 첫째 "반공과 친미외교"를 국시로 하고, 둘째
좌경분자들의 준동으로 야기된 사회혼란을 바로 잡으며, 셋째 구악과 파쟁을
일소하고, 넷째 기아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경제계로선 남북대치상황에서 "반공"이면 우선 안심이었다.

참석자들은 다만 군인들이 경제실무에 어두울 수 밖에 없으니 이 기회에
경제협의회의 창립정신과 경제발전 방향에 대해 문서로서 건의키로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회의가 끝날 무렵 매사에 성급했던 S사장이 엉뚱한 제안을 했다.

경제계가 군사혁명 지지 성명을 신문광고로 내자는 것이었다.

모두들 어쩔줄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다만 항상 신중했던 최태섭 한국유리사장이 "경제협의회가 정치단체도
아닌데 지지성명 광고까지 낼 필요가 있을까요"라며 말을 끊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될 때 전택보 부회장이 회의장에 나타났다.

전 부회장은 이웃에 사는 허정 전내각수반을 만나고 오느라 늦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허정씨는 사태가 혼미해서 좀 두고 봐야겠다고 하십디다. 지금 막 맥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이 "반란군은 곧 자수하고 원대 복귀하라"는 특별성명을 발표
했다는 라디오 뉴스를 듣고 오는 길입니다"

전 부회장의 이 한마디로 지지성명 광고는 없던 일로 됐다.

전 부회장은 그러나 이같은 발언을 누군가가 왜곡, 밀고하는 바람에 그해
9월 중순 반혁명음모로 구속돼 2달여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다음날 속개된 운영위원회에는 경제5단체 대표도 참석했다.

경제협의회는 상의의 이도영(60년대 생사수출왕이자 홍익대학설립자)
부회장을 비롯한 무협 방협 대표 들을 포함시켜 건의서를 작성했다.

정변의 불안 속에서도 "구국일념" "경제건설 주역"이라는 신념을 갖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건의서를 군사혁명위원회에 제출했다.

"우리 경제계는 군사혁명의 "반공국시"와 "사회기강청신"천명에 찬의를
표하며 경제건설에 헌신 봉사할 것을 다짐한다.

우리 경제계는 종래 정치에 예속돼 자주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는 곧 온갖 비리와 경제침체의 근본 요인이었다.

앞으로 당국은 자유경제창달을 정책의 기본으로 삼을 것을 새삼 요청한다.

경제계획 정책수립과 국제협력 등에 있어서 경제인의 경험과 정보가 십분
발휘되도록 배려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온통 나라가 어수선한 판에 이 같은 건의가 받아
들여질 리 없었다.

받아들여지기는 커녕 김용완 경방사장 등 몇명은 구호양곡 지원모금 회의에
참석했다가 1주일간 구금되기도 했다.

드디어 5월22일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 제6호로 모든 경제단체의 활동은
전면 중단됐다.

며칠 후 수정된 포고령에 의해 법인단체는 재신고만으로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협의회는 당초부터 임의단체였으므로 영영 활동이 정지됐다.

22일자로 김연수 회장, 전택보 부회장, 이한원 부회장이 자진 사임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제협의회 중견멤버였던 대기업주 10여명이 부정축재
했다는 이유로 29일 긴급 구속됐다.

경제협의회는 존속여부를 논하기 위해 6월 들어 몇차례 운영위원회를
소집했으나 성원이 안돼 회의를 못했다.

6월30일에는 사무국직원 전원이 자진 휴직했다.

사무국직원들이 운영위원과 감사들을 만나본 결과 해산보다는 일단 정회를
해놓고 후일 재발족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에 따라 8월5일 각 회원들에게 회무정지를 통보하고 일체의 문서와 비품을
보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오늘까지 전경련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로써 경제의 자주성을 주창하기 위해 기업인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던
한국경제협의회는 사라졌다.

동시에 이들이 세웠던 이 나라 발전구상들도 같이 묻히게 됐다.

그러나 높은 이상과 기개를 지닌 민간 경제계의 인맥은 경제재건촉진회
한국경제인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로 면면히 이어졌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