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등촌동에 사는 오미순(59)씨.

"한평생 한점 부끄럼없이 살아왔다"는 그는 요즘 세입자들의 등쌀에 죽고
싶은 심정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뒤 지난해 7월 남은 재산을 모두 정리해 3억원의 전세를
끼고 6억5천만원짜리 3층 연립주택을 산게 화근이었다.

부동산에 투자해 두면 임대수입과 시세차익이 발생, 혼자힘으로도 여생을
꾸릴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던 것.

그러나 IMF이후 전세값이 폭락하면서 불면의 밤은 시작됐다.

세입자들은 전세금을 낮춰주지 않으면 "법대로 하겠다"며 오씨를 파렴치범
으로 몰고 있다.

집을 팔아 전세금을 돌려주려 해도 살려는 사람이 없다.

집이 팔리더라도 집값이 IMF이전의 반값이라 전세금을 내준뒤 거리로 내몰릴
형편이다.

올해말 수원 권선구 LG아파트 38평형에 입주예정인 김철민(37)씨도 3년전
결정이 후회막심이다.

서울에서 24평형 전세를 7천만원에 살던 그는 내집마련을 위해 4천만원의
융자를 얻어 38평형을 1억2천6백만원에 분양받았다.

분수에 넘치는 큰 평수라고 생각했지만 클수록 가격상승률이 높다고 판단,
무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입주도 못해본 아파트를 최근 분양가보다 3백만원 싼 1억2천
3백만원에 팔았다.

IMF고금리에 따른 금융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내집마련의 꿈을 접은 것.

넓은 집을 갖게 되고 시세차익도 볼 것이란 기대는 빚덩이로 돌아왔다.

서민들의 "재산목록 1호"인 주택값이 어느날 갑자기 폭락세로 돌변하자
전국이 아우성이다.

집주인은 집주인대로, 세입자는 세입자대로 고민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집을 팔아봐야 전세금도 다 못내주는 "집가진 죄인", 해외나 지방으로
발령받은뒤 전세금이 빠지지 않아 혼자 부임하는 "IMF이산가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오붓하게 지내던 집주인과 세입자가 "원수"로 돌변하고 임대주택사업자로
등록해 "사장님"대접을 받던 건물주가 "도망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부동산시장 변화를 한발앞서 포착한 사람에겐 요즘이 기회의 시대다.

D투신사의 주식운용역 K(35)씨.

그는 지난해 11월 살던 집을 처분, 전세로 옮기면서 차액을 채권에
투자했다.

고금리덕에 지금 집을 산다면 예전에 살던 집을 두채나 살 수 있게 됐다.

자산디플레이션을 예상하고 과감히 부동산을 내던진게 적중한 것이다.

빈 사무실을 소규모창업자를 위한 1.5평짜리 SOHO빌딩으로 개조해 불과
수일만에 임대를 끝낸 건물주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시대변화에 맞는 개발을 통해 적극적
으로 수요자를 찾아 나섰다는 점이다.

상황이 이러니 부동산가치 산정방식도 "옆건물이 5억원이니 내건물도 5억원"
이라는 식의 거래사례비교법에서 수익환원법으로 바뀌고 있다.

수익환원법은 임대수입과 같은 현금흐름에 기초해 가격을 결정하는 것.

이런 기준하에 서울 테헤란로 등 노른자위상권 오피스빌딩의 가격거품이
걷히고 있다.

압구정 신촌 등에도 권리금없는 점포가 나오고 있다.

앞으로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서도 집값이 예전수준으로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란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국토개발연구원 정희남 박사는 "부동산패러다임의 변화가 국민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며 "집이나 땅을 소유하는데 집착하지 말고
이용의 개념으로 접근해야한다"고 조언했다.

과거의 소유개념에 안주하는 사람에겐 위기의 시대, 변화를 읽어나가는
사람에겐 기회의 시대인 셈이다.

< 백광엽 기자 kecorep@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