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발전 초기단계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동원을 통한 양적 팽창이 성장을
주도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동원이 어려운 단계에 이르면 양적 성장은 곧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는 자원을 좀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핵심적인 과제로 등장한다.

다시 말해 질적 성장으로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양적 성장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방향전환에 성공하려면 도처에 남아 있는 후진성의 잔재를 모두
털어내야 한다.

바로 이 작업이 요즈음 우리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있는 구조개혁이다.

이에 성공한 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는 영원히
후진국으로 남아야 한다.

양적 성장만으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나라는 어디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없다.

80년대 중반에 들면서 우리 경제의 양적 성장은 차츰 그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따라서 성장률 높이기에 급급한 정책기조를 청산하고 과감한 구조개혁에
나서야 했을 터였다.

그러나 "3저호황"에 들뜬 우리는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해 버리고 말았다.

개혁은 커녕 당시의 사회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해이해져 갔다.

해외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우리 기업들에 3저호황은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그렇지만 긴 안목에서 보면 그와 같은 일시적 호황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하나의 불운이었다.

그때 구조개혁의 기회를 놓쳐 버렸기 때문에 오늘의 더 큰 어려움을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사에 나오는 "새옹지마"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90년대 초 행운이 결국 불운으로 바뀌는 경우를 또 한번 겪게 된다.

뜻하지 않게 우리 반도체산업에 찾아든 호황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경제는 한동안 반도체산업이 벌어들인 달러로 흥청망청댈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외치는 소리가 제대로 들릴리 없었다.

이번에도 구조개혁은 또다시 뒷전으로 밀려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반도체산업의 성공은 세계시장의 상황에 따라 발생한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리 반도체산업은 단순한 기술을 요하는 메모리칩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제 우리가 선진국이나 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졸업하고 첨단산업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공연히 허영심만 잔뜩 커진꼴이 되었던 셈이다.

되돌아 보면 우리 경제의 체질은 3저호황이나 반도체 특수를 통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음이 분명하다.

체질강화를 위한 개혁도 없이 덩치만 커지는 바람에 경제는 콩나물처럼
연약한 체질을 갖게 되었다.

일시적 호황으로 인해 이곳저곳에 만연해 있던 거품은 더욱 커져 갔다.

외환위기의 궁극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기업들의 과잉투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바로 그때쯤이었다.

그렇지만 새옹지마의 이치는 지금까지 본 것과 반대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즉 불운으로 보이는 것 속에 행운의 싹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이 고사에서 우리는 극심한 불황의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현명하게 대처하기만 한다면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는 힘찬
재도약의 기회로 바뀔 수도 있다.

이 위기는 지난 10여년을 허비한 우리에게 구조개혁의 마지막 기회로
주어진 것인지 모른다.

갖가지 핑계로 개혁을 미루어온 우리를 벼랑으로 몰아가 죽기 아니면
살기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어리석게 이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우리는 미래에 대해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

과감한 구조개혁을 통해 경제의 체질을 강화하지 않는 한 곧 제2, 제3의
위기를 맞을 것이 뻔하다.

그 때의 고통은 지금의 몇 배에 달할 것이다.

3저호황과 반도체특수가 결국 불운이 된 것처럼 오늘의 어려움은 더 큰
행운으로 바뀔 수 있다.

고통 속의 우리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이 새옹지마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이지 지금은 우리 경제가 더욱 튼튼한 체질로 다시 태어날 절호의
기회다.

과거 그 어느 때에도 이렇게 좋은 개혁의 기회를 맞아본 적이 없다.

고통이 큰 만큼 그것을 이겨낸 후의 기쁨이 더욱 크리라고 믿는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