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작가 이경자(50)씨가 새 장편 "사랑과 상처"(실천문학사)를 펴냈다.

강원도 양양을 무대로 그 지방 산세만큼이나 험난한 한 여인의 칠십평생을
그린 작품.

이른바 페미니즘 소설로 불렸던 "절반의 성공"이나 "황홀한 반란"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지난해 페미니즘 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페미니즘의 "담장"을 훌쩍 뛰어 넘는다.

여성과 남성의 단선적인 대립보다 잘못된 인습과 제도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들춰낸 것.

그간의 작품이 삶의 한 지류를 비춘 것이라면 이번에는 여러 강물이 한 데
모이는 인생의 바다를 그린 셈이다.

발문을 쓴 박완서씨도 "여지껏 해온 일련의 작품세계로부터 환골탈태를
보는 것 같은 신선한 놀라움"을 나타냈다.

주인공은 "쓰잘데 없는 지즈바" 정옥.

"귀한 밥 멕여 키워봤자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어머니의 지청구를
들으며 천덕꾸러기로 자란다.

말조차 늦어 "벙치"로 불리던 그녀는 열아홉에 고향 물갑리를 떠나
화전골로 "남 좋은 일 시키러"간다.

남편은 화전민의 아들 준태.

신혼생활은 그런대로 행복했다.

그러나 "귀한 고추"로 자란 남편은 점차 내면의 폭력성을 내비친다.

해방후 몰아닥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고향을 등진 정옥네.

전쟁끝에 철강기술자와 미군부대 잡부로 전전하던 남편은 좌절을
되풀이하며 시도때도 없이 폭행을 일삼는다.

악착스런 삶에 부대끼던 정옥은 둘째 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고 그곳
여성들의 "자유"에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재봉일을 하며 생애에서 가장 자유로운 삶을 맛본다.

그러나 뒤따라 들어온 남편은 이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평탄치 못한 큰 딸의 불행을 지켜보며 한많은 "여자의 일생"을 되돌아보는
정옥.

칠순을 넘긴 "뚝멀구 처녀"의 눈이 애잔하다.

이 작품의 화두는 "남존여비"와 "가부장 문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비천한" 정옥과 비록 화전민 아들이지만 "귀하게"
자란 준태.

작가는 이처럼 극단적인 원체험을 가진 둘의 삶이 서로에 의해 황폐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금강석이나 불가사리처럼 오랜 세월 그 시대에 맞는 옷을 갈아입으며
그 사회가 요구하는 노래를 부르는 능력"으로 살아남은 남존여비 사상.

"전쟁과 혁명의 시대에도 그랬고 산업사회에서도 마찬가지죠.

더 무서운 것은 이것이 우리들 사이에 교묘하게 뒤섞여 있어 쌀의 뉘처럼
골라내거나 암처럼 도려낼수도 없다는 사실이에요"

작가는 소설 속에서 "페미니즘"얘기를 한번도 안한다.

남존여비라는 보이지 않는 굴레가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얼마나 훼손시키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얼금뱅이" 할머니로부터 정옥을 거쳐 딸들의 세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상처.

큰 딸 윤이의 편지처럼 "자기도 모르게 희생자가 돼버린 아버지를 용서하고
엄마가 스스로를 사랑하면" 온전히 치유될수 있을까.

< 고두현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