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이 아름다운 까닭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불순물" 때문이다.

모래에 크롬이 미량으로 녹아들면 풀빛의 에메랄드가 된다.

산화알루미늄에 산화티탄이 조금 섞인 것이 하늘빛의 사파이어이다.

티탄 대신에 산화크롬이 들어가면 루비로 바뀌어 강낭콩 꽃처럼 붉은 색을
뿜는다.

그렇다고 해서 모래나 돌에 섞여드는 물질이 귀한 것들도 아니다.

흔해 빠진 금속산화물에 불과하다.

그냥 돌이고 흙인 것이 적당한 양과 종류의 이물질을 받아들이면서 고귀한
변신을 하는 것이다.

이 맹랑한 자연의 이치는 사회제도와 이념에도 그대로 작동한다.

바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게 한 것이 이 "보석의
이치"다.

반론과 이견이 허용되고 그것들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면서 조화로운 결론을
빚어내는게 이 시스템이다.

방종과 폭력이 아닌한, 아예 질서를 붕괴시키지 않는 한, 대립과 갈등은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돼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결론에 영향을 미친다.

한데 시장경제를 부르짖고 등장한 새정권에서도 이 자연의 논리는 여전히
무시되고 있다.

일방적인 선언만 있고 반론의 여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사정이 어렵다고 하소연이라도 하려들면 개혁거부로 매도당하고 마는게
작금의 분위기다.

며칠 전에 정부는 중소기업의 은행대출금 만기를 6개월이상 연장해 주도록
했다.

물론 주체는 은행이다.

은행장들은 곧바로 그 다음날 아침에 모여 고통분담에 동참한다는
"자율결의"를 했다.

은행장회의 날짜까지 정부의 발표문에 미리 들어가 있었으니 회의장의
분위기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자금사정이 좋지않은 한 은행장이 아쉬운 소리를 하려다가 낭패를 당할 뻔
했다고 한다.

쓸데 없는 소릴랑 관두라는 것이었다.

거부하겠다는 것도 아니고,단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해서야 효과가
나겠느냐는 말을 꺼냈을 뿐인데 마치 도적몰듯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임기가 남은 멀쩡한 은행장마저 무슨 까닭에선지
"자진해서" 사표를 내는 판국에 이유를 대려했다는 건 섶을 지고 불속으로
달려든 꼴이나 다름없었다고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하루가 멀게 나오는 재벌정책도 내용은 어떨지 모르지만 형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른바 "빅딜"은 말을 꺼내자마자 머쓱해져서 도로 집어넣었다.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지 않았으니 실현가능성과 부작용은 검증됐을 턱이
없다.

준비되지 않은 정책이 강요될 경우의 후유증을 뒤늦게 지적받은 경우다.

계열사를 3~4개로 줄이라거나, 기조실을 없애라는 등의 후속조치도 그렇다.

오랫동안 지적돼온 문제점이고 당위성도 부인할수 없다.

하지만 반론과 대안을 용인하지 않는 한 그 취지와 가치는 묻혀버리고
만다.

옳고 그름을 떠나 두려워서 말조차 못한다면 그것은 반시장경제임에
틀림없다.

반론이 항명으로 단죄당하고, 그 황당한 괴씸죄가 서슬 퍼렇게 살아서
돌아다니는 경제는 더이상 시장경제가 아니다.

나빠진 정황을 이유로 말이 법을 대신하고 관치가 휘둘리어지는 것도
시대역행이다.

전전긍긍하며 제시한 대안을 개혁거부로 몰아치는 것 역시 반민주다.

물론 비상시국이다.

사상 유례없는 위기다.

지금까지의 악습을 일거에 뒤집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미적거리다 여기까지 온 것이 위기를 키웠기에 빠른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특히 재벌에 관한한 난국탈출에 필요하다면 다소간의 억지가 필요하다는
공감이 있는 것도 현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강요된 개혁이 어떻게 결말지어졌는 지는 멀리 갈것도 없이 바로
지금의 정권에서 보면 쉽게 안다.

독단이 물려준 것은 위기 뿐이다.

최대의 업적이라고 내세우던 온갖 개혁들은 오히려 개악이상의 평판을
받지 못한다.

이물질을 거부하고 저혼자만을 고집하면 한낱 잡석이 되고마는 자연의
섭리는 "순수함"이 개혁의 전부가 아님을 되새겨준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