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스코틀랜드의 공작 버클루(Beccleuch)는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
(Adam Smith)를 가정교사(tutor)로 맞아들였다.

그 대가로 버클루는 스미스에게 매년 3백파운드씩을 "평생" 지급하겠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글래스고 대학의 도덕철학교수라는 학문적 권위를 누리고 있던 스미스는
버클루공작의 스승이자 고문이며 평생 말벗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이에 보답코자 버클루공작은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 스미스를 에딘버러
관세청장의 위치에 이르게까지 해주었다.

이로 인해 스미스는 관세청에서도 연6백파운드의 돈을 추가로 받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스미스는 버클루에게 편지를 보내 이제까지 받아오던 가정교사
보수 3백파운드는 더이상 받지 않겠다고 했다.

버클루공작은 "스승 스미스가 스스로의 명예만 생각할 뿐 나(공작)의
명예는 생각해주지 않는 것같다"며 서운해 했다.

버클루 공작이 당초 약속대로 3백파운드를 스미스가 죽을 때까지 매년
보내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진정한 의미의 영국신사도와 계약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대목이다.

서양문화는 이런 토양위에서 자란 계약(contract)문화다.

계약은 자존심 신의 자신감, 그리고 신사도의 표현 그 자체다.

지킬 자신이 없는 계약에는 서명을 하지 말아야 하며, 일단 서명한 계약은
어떤 불이익이 있더라도 존중할줄 아는 것이 계약문화의 본질이자
문명사회를 받쳐주는 뼈대다.

국제사회는 이런 인식체계와 규범의 틀에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계약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외환위기를 맞아 우리는 국제사회와 많은 계약을 맺고 있다.

지난해 IMF와 서둘러 체결한 구제금융협정이 그 대표적인 예다.

계약준수를 생명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대선기간중 터져나온 재협상론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그 후유증을 인식하고 이를 즉시 철회한 것은 다행이지만
재협상론이 전혀 불거지지 않았던 것보다 개운치 못한 것은 사실이다.

노.사.정간의 대타협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사.정타협은 일견 국내문제인 것처럼 보여질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외와의 간접계약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국인들의 직.간접투자를 외환위기탈출의 활로로 여기고 있는 우리로서는
노.사.정간의 합의도출이야말로 외국자본을 유인할수 있는 촉진제가 될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타협이 있고 난 후 일부 노동계가 이에 이의를 달고
파업을 선언함으로써 온 국민은 물론 외국인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노동계가 국민의 불안감을 의식,현명하게 파업을 철회했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보다 개운치 못한 것은 사실이다.

만기연장을 위한 뉴욕협상에 대한 평가 또한 보는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우선 침몰하는 한국호를 살려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절체절명의 협상이었다.

그러나 이 협상의 결과,외국은행들은 정부보증 2년만기 자금의 금리가
리보(LIBOR) +2.5%로 결정됨에 따라 일반회사가 빌리는 자금은 적어도
이보다는 더 높아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됐고, 따라서 뉴욕협상은
한국이 빌리는 최저금리(floor)를 결정짓는 기준이 돼버렸다는 비판론도
없지 않다.

그 피해가 개별기업에 즉각 이어진 것은 물론이다.

외국은행들이 한국기업들에 대해 기존 금리보다 높여달라고 나온 것이다.

정부가 보증한 금리보다는 최소한 더 높게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대부분 계약서가 외국인들이 이런 권리를 행사할수 있게 허용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이유로 뉴욕협상이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재협상하자고 나설수 있을까.

그럴수 없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다소 불만족스러운 점이 있더라도 일단 서명한 계약은 존중하여 신용을
지키는 것이 장기적으로 득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례는 국내 금융기관들이 외수펀드를 설정, 선물계약을
맺으면서 빚어진 피해에 따른 것들이다.

보다 복잡한 사안들이 많이 얽혀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초점을 흐리지
않기 위해 문제를 단순화시켜보면 지난해 태국의 바트화가 폭락함에 따라
국내 금융기관들이 적지 않은 손실을 입게 된 것이다.

보도된 대로라면 "외국 금융기관이 계약과 관련한 위험(risk)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손실을 부담할수 없다"는 것이 국내
금융기관들의 입장이다.

상품을 판 외국금융기관이 이를 구입하는 고객에게 상품의 미세한
부분까지 세세히 설명해줄 성실의무(due diligence)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계약서상 변제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충분한 사유가 된다고
인정될지는 더 두고볼 일이다.

국내 금융기관들이 무한대 리스크를 어느 일정 수준에서 차단할수 있는
제동장치(cap)의 도입을 소홀히 한 이유 또한 분명히 해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어느 계약이건 서명전과 서명후의 말이 달라지는 것은 소망스럽지 못하다.

우리는 국제화 개방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도 국제사회의 인식체계와 규범을 적극 수용하고 이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신용보다 중요한 재산은 없다"는 말은 같은 맥락의 표현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서양에서와 같은 계약정신이 있다.

일언중천금이란 표현이 그것이다.

꼼꼼히 읽어야 할 계약서를 대충대충 읽고 서둘러 서명한후 나중에 딴
소리 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불분명한 부분은 꼬치꼬치 캐물어 완전히 소화한 후 서명하는 것은
계약의 기본이다.

이런 습관이 우리 몸에 배지 않는 한 "촌스러운 한국인들"이라는 소리가
사라지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