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리오 가르사 < 주한멕시코 대사 >

70년대 후반까지 멕시코의 경제발전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68년 올림픽게임, 70년 86년 두차례 월드컵을 개최하는 등
국제적 명성과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발전과 더불어 멕시코의 대외부채는 꾸준히 늘어나 80년대초반
8백억달러를 넘어섰다.

이같은 부채는 편중된 수출구조에서 비롯됐다.

수출품의 80%이상이 석유관련제품이었기 때문이다.

82년 국제원유가가 급속도로 하락하면서 멕시코경제는 위기를 맞았다.

석유붐에 종지부를 찍게 되고 대외금융조달마저 차단당했다.

멕시코정부는 경제전략에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인식, 금융부문의 민영화,
국영기업매각, 규제완화, 외국투자유치, 관세무역일반협정(GATT)가입 등
장기간의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90년대초 가까스로 신뢰를 회복됐던 멕시코경제는 94년 다시 채무불이행의
위기에 직면한다.

위기의 원인은 불안정한 외국자본의 유입에 따른 경상수지적자와 대규모의
장기프로젝트에 따른 단기차입자본이 주범이었다.

국가적 위기의 원인에 대해 전국적인 토론이 시작됐다.

몇몇 사람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개혁이나 대외개방정책을 비난했다.

이들은 과거의 보호주의와 폐쇄경제정책으로의 복귀를 제안했다.

하지만 보호주의는 시대흐름에 역행하는 정책이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디오 대통령을 중심으로 개혁주의자들은 6단계의 경제회복계획을 추진
했다.

첫째 미국 캐나다은행 및 국제통화기금(IMF) 등과 다각적인 협상에 들어가
4백88억달러에 달하는 금융지원을 끌어냈다.

단기유동성위기를 극복, 위기가 다른 건전한 부문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했다.

둘째 세율과 공공요금을 높이고 임금을 동결시켰다.

부가가치세는 10%에서 15%로 인상됐다.

이는 사회적으로 고통스런 부분이었다.

셋째 농업부문을 개혁하고 전화 항만 공항 철도 천연가스 전력부문을
민간투자자들에게 개방했다.

넷째 새로운 연금기금을 설립했다.

위기원인중 하나가 투자를 위한 국내저축의 부족에 있었다는 것을 세디오
대통령은 인식하고 있었다.

다섯째는 투명한 재정정책의 실행이다.

중앙은행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헌법이 수정됐다.

주간단위로 외환보유고를 발표하는 등 경제지표들의 신뢰도를 높였다.

마지막으로 "경제회복을 위한 협약"(후에 경제발전을 위한 협약으로
진전됨)을 맺었다.

노.사.정대표가 모여 고용과 임금을 논의, 결정하고 인플레이션안정에
역점을 뒀다.

멕시코국민들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의 덕분으로 경제는 96년 5.1%, 97년
7.5% 성장할 수 있었다.

지난 3년간 연평균 25.6%에 달하는 수출증가율을 기록, 세계에서 10번째의
수출국대열에 올랐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94년 멕시코에 비해 훨씬 양호한 상태라고 본다.

한국이 지난 30여년간 이룩한 인적.물적자본이 거의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던 한국민은 특유의 기질과 단결로 현재의 위기를
무난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