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발전의 사회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박성래 교수.

부총장을 맡고 있지만 권위란 느낄수 없다.

동안에다 항상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진지하게 과학을 탐구하는 그의 모습은
언제봐도 때묻지 않은 아이의 모습 같다.

61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극심한 취업난 때문에 중학교 물상교사가 되려고 작정했다가 때마침
기자시험공고를 보고 지원해 J일보에 들어갔다.

5.16혁명 직후 정부가 과학입국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면서 신문에서도
과학기사의 비중이 높아지자 필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당시의 "박기자"는 과학의 원리와 현상을 역사와
배경을 곁들여 쉽고 재미있게 설명, 독자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기자생활에 싫증이 나기도 했고 공부도 하고 싶었다.

미국 풀브라이트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67년 도지한 그는 3년간 미국
캔자스대학에서 과학사를 전공해 석사학위를 땄고 69~77년 하와이대학에서
한국사를 전공해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과학사를 공부하면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진화해온 과학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 외국의 과학사관이 여과없이 수용되고 있는 현실도 꼬집는다.

예컨대 지동설의 등장은 서양에서는 신학 우주관 인생관을 뒤흔들 정도의
변혁일수 있지만 동양에서는 그리 큰 의미가 없는데도 차별화되지 않고
받아들여졌다고 역설했다.

동양의 경우 신앙보다는 군신 부자 등 수직적인 관계와 윤리가 사회를
유지하고 있어 지동설의 사회적 영향이 미미했다는 설명이다.

동양인은 비신앙적이라고 말하는 일부 서양 사회학자들의 주장과 일맥상통
한다고 볼수 있다.

그는 이렇듯 과학사를 비롯 경제사 문화사에 이르기까지 옷만 갈아입은채
그대로 대입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며 주체성있는 겨레과학사가
정립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과학기술자들의 중인의식도 꼬집었다.

겨례과학에 대한 역사의식없이 물질적으로 풍족하면 그만이라는 과학자들의
잠재의식은 스스로 그들의 사회적 위상을 우물안 개구리로 좁히고 있어 많은
글쓰기와 주장을 통해 이를 시정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정문일침.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