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대한민국명장전이 개막된 지난 5일.

전통가구 명장 조석진(44. 전주 명장가구사 대표)씨는 전시장인 서울
공평아트센타에서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한 외국인이 그가 출품한 전통장롱을 보더니 선뜻 "사겠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계속 거래하자"고 제의했다.

손님 이름은 존 어네스트.

뉴질랜드 리치카튼에 있는 조니어 엔터프라이시스라는 무역회사의 전무
이사였다.

조명장은 무역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기뻤다.

수입 가구에 짓밟혀버린 대한민국명장의 자존심을 한 외국인이 조금이나마
보상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전통가구를 만들기 시작한지 어느덧 30년.

돈 벌고 싶은 유혹도 뿌리치고 자존심 하나로 버텨왔다.

조씨가 장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국민학교 졸업식 다음날인 66년2월17일.

가정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어 전주시내에서 전통가구 장인으로
유명한 안은성씨 문하에 도제로 입문했다.

도제로 일하는 6년 동안에는 기술을 배우는 대신 돈은 받지 않기로 했다.

장인의 길은 험난했다.

처음 1년동안 스승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깨너머로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2년째 들어서야 대패와 끌을 만지게 됐다.

그러나 스승은 "이것도 일이라고 했느냐!"며 호통치기 일쑤였다.

야단맞고 나면 오기가 발동했다.

조씨는 일과후 혼자 남아 땔감으로 버려질 나무에 구멍을 뚫고 대패질을
했다.

스승이 더이상 야단치지 않을 때까지 사흘이고 열흘이고 기술을 연마했다.

밤늦게 귀가하느라면 무섭기도 했다.

작업장에서 시골 집까지는 40리.

걸어서 두시간 거리였다.

그러나 조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지식을 배우지 못한다면 기술이라도 익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도제생활을 마치던 날 스승은 공구 한 벌을 주었다.

그로서는 미래를 개척하는데 필요한 유일한 무기였다.

혹독한 도제생활은 헛되지 않았다.

72년 전북기능경기대회에서 조씨는 마침내 금메달을 땄다.

이듬해에는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74년에는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기능경기대회에서 가구부문 1위로 입상했다.

그가 국가대표로 선발될 무렵 할머니와 어머니가 병환으로 몸져누웠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국제대회에서 금메달 따내 실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조씨는 동생들에게 병구환을 맡기고 훈련에 몰두했다.

그 결과 이듬해 스페인에서 열린 국제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4년 연속 각종 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자 굴지의 가구회사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거절했다.

힘들여배운 전통공예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못 하나 박지 않고 틈새없이 조립하여 만들어내는 전통가구.

이것은 그에겐 "상품"이 아니라 "작품"이다.

장인으로서의 이같은 고집은 10년뒤 또다른 결실을 맺었다.

88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명장부 목재수장부문 1위를 차지, 이 부문
초대명장에 올랐다.

그러나 조씨에겐 아직도 갈길이 남아 있다.

인간문화재로 지정돼 전통가구공예를 전승하는데 일생을 바치는 것이 그의
희망이다.

조명장은 "공들여 만든 전통가구는 어느모로 보나 외제보다 낫다"고 했다.

또 "외제가구를 선호하는 일부 부유층의 정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광현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