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어음거래량은 연간 3천7백조원, 하루에 10조원가량에 달한다고
한다.

선진국의 경우 어음거래가 전혀 없거나 크게 줄어드는 추세임에도 불구
하고 유독 우리나라만이 어음거래가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여 판매대금중
어음결제비율이 60%에 육박하고 있고 어음부도율도 90년의 0.04%에서 97년에
들어서는 0.2%를 상회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어음거래는 기업간 신용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여 순기능이
매우 크지만 연쇄도산이나 비용전가를 초래하는 등 역기능도 이에 못지 않게
크다.

따라서 최근 어음거래의 역기능을 줄이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보면 어음제도에 관한 기술적인
측면만을 고려하여 본질적인 접근이 소홀한 감이 없지 않다.

어음발행량을 줄이기 위한 어음발행액에 대한 부담금이나 인지세 도입,
당좌수표결제로의 유도를 위한 지급기일약정 수표제도도입, 어음의 남발을
줄이기 위한 어음부도자에 대한 제재강화 등이 그것이다.

어음거래가 늘어나는 주된 원인은 기업의 재무상태 악화로 인한 현금지급
능력의 저하, 어음발행인(대기업)과 수취인(중소기업)간의 교섭력 격차 확대
및 유통금융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금융시스템의 낙후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접근없이 어음제도에 대한 기술적인 접근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어음발행에 대해 비용을 부담시키는 것은 교섭력이 약한 어음수취인에게
로의 비용전가만 초래할 뿐이다.

어음기일의 장기화를 막겠다고 어음기일을 60일내로 제한하고, 이 기간을
초과할 경우 금리를 지급하라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규제가 물품을 납품받고도
한달이상 어음을 발행하여주지 않아 오히려 납품업체의 어음할인 기회만
줄이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어음부도 사유를 따지지 않고 부도에 대한 제재만 강화한다고 해서 어음
부도율이 줄어들지 않는다.

고의 또는 사기어음의 경우 제재는 강화되어야 하지만 기업의 일시적인
재무적 곤경이나 거래업체로부터 받은 어음의 부도 등으로 불가피하게
부도를 낸 경우는 제재보다는 기업의 재건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매우 경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어음부도에 대한
제재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현재 단 1개의 어음이 부도나는 경우에도 어음부도의 사유를 따지지 않고
은행단협정에 의해 당해 기업은 적색거래처로 지정되어 은행거래가 정지되고
부도금액을 변제한다고 하더라도 3년간 신용불량자로 관리되며 당좌거래는
2년간 정지되게 되어 있다.

이에따라 일단 부도가 나면 당해 기업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리나
파산절차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제재를 강화한 목적은 어음거래에 대해 공신력을 부여함으로써
지불제도의 안정성을 제고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어음은 지불수단이 아니라 금융수단이다.

90~1백20일짜리 CP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자기책임하에 이루어지는 사적계약거래에 대해 국가기관도 아닌 사적
단체인 은행들이 집단적으로 중제재를 가하는 것은 권한의 한계를 넘는
것이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경우 수표의 부도발생시 당좌거래정지는 없고
수표발행인과 소지인간의 채권 채무문제로 해결하고, 다만 금융기관이나
신용정보기관들이 부도를 낸 자를 불량거래자로 분류 관리함으로써 이들의
경제활동을 제약하는, 시장에 의한 제재를 선택하고 있다.

우리도 이와같은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한다.

지급기일약정 수표는 사실상 어음이지만, 어음은 부도시 형사적 제재를
받지 않으므로 형사적 제재를 받는 부정수표단속법의 적용을 받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교섭력이 큰 지급인이 부도시 제재가 낮은 어음을 두고 형사처벌
까지 감수하고 당좌수표를 발행할 턱이 없다.

당좌수표부도에 대한 제재강화는 결국 당좌수표거래의 위축을 초래하였고
이것이 바로 부정수표단속법을 개정하여 수표부도시 제재를 피해자의 처벌
의사가 없을 경우 처벌하지 않는다는 반의사불론죄로 바꾼 이유이다.

옛날 개성상인들은 어음을 결제하지 못한 자를 노비로 삼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시절 어음부도율이 지금보다 낮지는 않았을 것이다.

은행이 어음발행자의 적격성에 대한 실질심사를 하지 않는한 은행만이
은행도어음을 교부하는 것도 재고하여야 한다.

현재 은행간 고객유치경쟁의 심화로 어음교부요건은 3개월이상 평잔
5백만원의 예금실적이면 족하다.

이 정도면 웬만한 사채업자는 수십개의 구좌를 개설할 수 있으며 실제로
시중에는 은행도어음을 판매하는 도매상이 성업중이다.

은행이 어음을 교부하는 제도는 5.16이후 도입된 것으로 도입당시의
취지는 어음남발을 막기위해 은행으로 하여금 일차적으로 부적격자를
걸러내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은행이 국가행정업무를 대신하는 관치금융적 발상이었다.

이 제도는 은행이 어음발행자에 대한 신용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오해만
주어 이를 악용한 고의 또는 사기부도를 촉진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효과도
적지 않았다.

어음제도개선은 그 본질에서 접근해야 한다.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 대.중소기업간 교섭력 격차축소 및 금융시스템
개혁이 그것이다.

우선 어음수취인이 어음발행자의 신용상태를 쉽게 조회할 수 있도록
신용조사기관과 신용정보망을 대폭 확충하고 팩토링의 활성화 및 매출채권
유동화 제도를 조기에 정착시키는 일이 시급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