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붉은 악마에게 알립니다. 경기당일 입장시간이 12시인 관계로
응원도구 준비와 경기장 주변 정리를 위해 회원 전원은 오전 9시까지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FORZA COREA!!!!!"(회장 신인철)

월드컵 한.일전을 하루 앞둔 지난주 금요일.

PC통신은 월드컵 붉은 악마들의 불타는 각오로 활활 타올랐다.

긴급 공지사항을 전하는 운영진의 소식에서부터 "일본아 길을 비켜라,
붉은악마가 나가신다" 등 각종 격문에 이르기까지.

붉은 악마가 2차 한.일전을 준비한 것은 경기가 치러지기 한달전부터.

신인철회장을 비롯 10명의 운영진은 매일밤 응원계획을 짜느라 밤을 새웠다.

경기 이틀전부터는 아예 집단 합숙에 들어갔다.

회원 1천여명은 단국대에 모여 응원가 연습에 몰두했다.

전날 밤에는 잠실 경기장 근처 여관을 통째로 전세냈다.

경기가 치러진 날.

드넓은 잠실벌의 주인공은 차범근 감독이 아니었다.

11명의 출전선수들도 아니었다.

붉은 악마가 바로 주인공이었다.

붉은 악마는 왜 이토록 응원에 온갖 정열을 불태우는 것일까.

"단지 축구가 좋아서만은 아닙니다. 일본에 질수 없다는 민족감정도
아닙니다. 문화다운 문화가 없는 우리나라 스포츠에 문화를 심기 위해서
입니다"

신인철 회장의 대답이다.

"붉은 악마(레드 데블스)"

2개월전 한.우즈베크전에 홀연히 나타났을 때만 해도 이들은 단지 신기함의
대상일 뿐이었다.

"응원한번 세게 하네" "할일 되게 없는 놈들이군" "일본 울트라 닛폰의
흉내잖아" 등 반응도 가지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붉은 악마는 분명 하나의 충격이다.

"스포츠는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라는 기존의 통념에 "혁명"을 가져온
장본인이다.

혹자는 이를 "문화의 충격"으로 받아들인다.

"21세기의 미래 에너지를 발견한 것 같다"는 다소 거창한 반응도 나온다.

붉은 악마를 "오빠부대"와 같은 부류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고가
단순했음을 금방 인정하게 된다.

붉은 악마는 그냥 탄생한게 아니다.

3년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된 결과물이다.

창단멤버들은 이른바 응원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두번이나 일본땅을
밟았다.

남미와 유럽의 앞선 응원문화에 대한 각종 자료도 수집했다.

"우리의 응원은 술과 욕지거리가 전부였다. 선수들이 실수라도 하면
관람석은 금방 험악해진다. 경기가 끝나면 술병과 각목이 날아다니고.. 무슨
일이건 격려와 이성적 비판보다는 비난과 훈수로 사태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우리 사회의 냄비적 특성의 반영이다. 이런 문화는 달라져야 한다"

붉은 악마의 건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확실히 붉은 악마의 응원을 보고 있으면 절로 신명이 난다.

2천여명이 베토벤의 교향곡 5번 "합창"을 허밍으로 부른 후 록뮤직 "GO
WEST"를 한목소리로 외칠 때는 장중함마저 느낀다.

붉은 악마는 놀라울 정도로 조직적이다.

문화를 고민하고 상업주의의 배격을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다소 철학적이기
까지 하다.

어디서 이런 독특한 힘들이 나오는 것일까.

회장인 신인철씨는 "자유와 독립"이라는 붉은 악마의 정신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붉은 악마에는 뜻밖에 30~40대 회원들이 상당수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50대까지 눈에 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이들이지만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젊은이들의 열정에 기꺼이 길잡이가 돼준다.

10대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두세대가 하나의 사상을 공유한다는 것이
붉은 악마의 가장 큰 동력이다.

PC통신은 이러한 정신을 공유하는 매개체이다.

지금 이시각에도 수많은 붉은 악마들은 PC통신안에서 그들의 사상을 토론
하고 있다.

< 정종태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