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 위기의 난파선"

97년 재계의 자화상에는 아마도 이런 제목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이미 작년부터 재계의 기상도에 몰려든 먹구름은 올들어 태풍으로 바뀌면서
한보그룹의 "아산만 드림"을 순식간에 좌초시켰다.

이후 삼미 진로 대농이 잇따라 쓰러져 "부도 도미노"라는 말을 낳더니
급기야는 재계서열 8위인 기아마저 누란의 위기에 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도행진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 차례는 어디냐"라는 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질 기세다.

마치 난파선 주위에 상어떼가 몰려들어 먹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형국
이다.

그래서 이제는 건실한 기업들마저도 가슴을 졸이게 만들고 있다.

재계의 시련은 부도만이 아니었다.

한진그룹은 괌 비행기추락 참사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또 선경그룹은 총수의 건강악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등 올해 재계에는
크고 작은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희망적인 것은 이같은 시련에도 우리 기업들의 "기업가 정신"은
아직 그 왕성함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현대와 동부는 혹독한 불황속에서도 각각 고로제철사업과 반도체사업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향해 발을 내딛고 있다.

삼성은 승용차시장에 뛰어들 채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고 LG 한솔 등도
그룹의 명운을 건 PCS사업을 순조롭게 출발시키는데 성공했다.

대우그룹도 세계경영을 성공적으로 뿌리내린데 이어 제2관리혁명으로
내실화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기업가 정신의 발휘와 함께 올해 재계의 테마가 되다시피한 "구조조정"도
우리 기업들의 미래를 밝게 해주고 있다.

현대 삼성 LG 등 대그룹은 물론이고 거평 나산 신원 등 중견그룹들도
수익성이 낮은 사업이나 자산을 정리하는 작업에 나섰다.

이들 중견그룹이 올들어 끊임없이 나돈 자금악화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구조조정 노력의 결실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재계의 이같은 노력은 내년에도 계속돼 재계판도에 일대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는 전망이다.

< 임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