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경제의 활력에 대한 의구심이 깊어지는 가운데 정부개혁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정부개혁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정부의 역할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개혁은 방향없이 노를 젓는 격이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부는 우리경제의 지배인 역할을 그만두고 시장질서의
후견인이 되어야 한다.

정부는 경제의 지배인으로서 해마다 성장 물가 국제수지 등의 목표치를
설정하고 그 달성을 위한 "운영"계획을 세운다.

정책담당자들은 이를 위해 모든 수단과 힘을 다 동원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목표달성을 위해선 시민의 자유나
재산권쯤 침해되더라도 괜찮다는 듯하며 과정이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자리만 피하면 책임추궁도 없다.

정부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보니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업의 성패는 기업가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결정되는게 아니다.

정부의 힘을 빌리면 안될 사업도 되고, 못 빌리면 될 사업도 안된다.

결과를 중시하는 정부가 덩치 큰 기업을 무시하지 못할 테니, 투자는
경제성을 외면한채 우선 저질러놓고 보자는 식으로 이뤄진다.

어떻게 해서든 사업을 확장해 놓으면 은행도 정부도 설마 도산시키랴 하는
계산이다.

어디를 돌아봐도 만연한 부실경영, 기업들의 극히 저조한 이윤율,
중소기업 뿐아니라 다수 대기업들의 도산, 위험수위에 달한 금융불안 등은
우리경제가 오랫동안 이렇게 작동해온 결과다.

당사자 개개인의 잘못이라고만 할수 없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한보비리, 경부고속철 부실공사 등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나쁜 열매다.

어떻게 이 총체적 부실을 없애고 내실있는 경제를 만들 것인가.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자유로운 시장경쟁에서 승자와 패자가 정부개입없이 결정되도록 하면 된다.

여기서 정부가 할 일은 시장경쟁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경제주체가 동등한 기회를 누리고 그들의 능력과 노력이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을 때 경쟁은 공정하며, 알고자 하는 경제주체 누구에게든지
그 내용을 알 길이 열려 있을 때 경쟁은 투명하다.

시장경쟁이 공정 투명할때 각 경제주체는 스스로 내실을 갖추려고 노력할
것이고, 이들 사이의 경쟁을 통해서 가장 잘하는 자가 일을 맡아서 하는
시장질서가 자생적으로 생겨난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그 잠재력을 최대로 발휘하게 된다.

정부는 이같은 자생적 시장질서의 생성을 돕고 보전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정부개혁은 이에 입각해야 한다.

이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국방, 법의 집행, 힘의 위협과 사기로부터
시민의 자유 보호및 재산권 보장이다.

다음으로 정부는 목표설정과 달성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운영"에서 손을
떼고 금융 재정 등 거시정책은 거시정책답게 산업및 기업에 대해 무차별적
으로 운용해야 할 것이다.

각 부처도 특정 산업 혹은 기업을 육성하거나 진흥한다는 목표를
버리고, 관할 분야의 경쟁에 관한 공정 투명한 규칙을 정립하고, 주어진
분야의 거래가운데 이러한 규칙에 의한 정부개입없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거래의 비중을 최대한 높이는 것을 주된 업무로 삼아야 한다.

즉 정부는 시장경쟁의 결과를 만들려하지 말고 시장경쟁의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정부조직및 기구의 개편, 정부 생산성 제고, 행정규제 철폐, 공무원 수의
조정 등은 이러한 기본방향에 입각해야 하고, 그때 비로소 시장경제의 기본
틀이 갖춰질 것이다.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시장경제가 창달되지 않고서는 아무
소용없다.

높은 과학기술 수준이 소련의 붕괴를 막지 못했다.

인류가 여지껏 쌓아온 지식의 대부분은 정부지원이 아니라 시장경쟁의
산물이다.

정부의 후견인 역할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으면 경제가 무너진다.

정부 안팎에 자유시장경제의 창달을 위한 개혁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는 개혁이라기보다 혁명이고, 그 핵심은 우리 경제의 인적 물적
자원을 누가 쓰게 되는가를 정부의 입김이 아니라 경쟁규칙에 의해 결정되게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추구해야 할 이같은 시장경제의 원리가 부처이익과
상치될 때, 정부가 손을 떼면 혼란이 일어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찬성이 반대로 바뀌며 3공화국 시대의 정부개입 논리가 부활하는 것을
우리는 본다.

자유시장경제 창달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은 있으나,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및 가부장제의 배경때문에 너나 할것 없이 뿌리깊은 정부의존적
정서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반면 시장질서가 우리를 먹여살리는
손이라는 확신은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로 하여금 스스로의 힘을 약화시키고 시장질서의
후견인이라는 생소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이다.

이 도전 앞에 위축될 필요도 없으나 얕보아서도 안된다.

정부역할및 시장질서의 재정립에 우리 사회가 적극적 자세로 임하면
우리 경제는 다시 한번 크게 도약할 것이다.

마지못한 자세로 임하면 우리는 경쟁국의 뒤를 쫓아갈 것이다.

이를 외면하면 우리는 낙오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