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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파일] (신세대 문화 엿보기) '옛멋' 사라지는 '월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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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월미도.

    섬의 생김새가 마치 반달의 꼬리처럼 길게 휘어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곳이 섬으로서 종지부를 찍은지는 꽤 오래됐다.

    지난 1922년 통선으로 사람을 나르던 불편을 없애기 위해 섬둘레 4km,
    육지와의 거리 1km 남짓하던 월미도를 육지에 복속시킨 것.

    월미도 낮은 관광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주말이 되야 젊은패들이 간간히 눈에 띌 정도.

    사실 월미도는 관광지로서 손색이 없을만한 조건을 갖췄다.

    율도 작약도 영종도 용유도 무의도 팔미도 등을 둘러볼 수 있는 유람선이
    하루에 14번씩 출항하고 있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1시간 반 남짓 소요하면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월미도 일몰도 인구에 회자될만큼 장관을 이룬다.

    그러나 밤만 되면 월미도의 얼굴은 금새 바뀐다.

    한가로운 관광지는 간데없고 고막을 뒤흔드는 디스코음악에다 네온꽃들이
    일제히 불을 뿜는 유흥가로 탈바꿈한다.

    바다를 정면으로 둔채 술집 까페 노래방 등 각종 유흥업소들이 들어선
    8백여미터 남짓한 거리.

    밤 8시께.

    인천지역 중고등학생들과 인근 원정패들이 부쩍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들은 각자의 목적대로 밤 11시까지 월미도를 어슬렁거린다.

    이 지역 중고생들은 무료한 시간을 떼울 양으로, 여자친구 동반한 이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분위기 좋은 까페 술집을 전전할 것이다.

    월미도 파출소 한 경찰관은 "인천에는 별로 갈만한데가 없어선지 중고등
    학생들이 대부분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을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려는 인천시의 의욕도 밤에는 여지없이
    꺽여버린듯.

    게다가 거리의 주인공이 중고등학생이여선지 별다른 놀이문화조차
    부재하다.

    기껏해야 거리 한켠에 힙합바지를 걸친 네댓명의 중고생이 춤판을 벌이는
    것이 고작이다.

    바닷가 벤치에는 몸을 밀착한 연인들이나 재미삼아 궁합을 보는 쌍들도
    간간히 눈에 띈다.

    최근들어 월미도를 찾는 사람이 크게 줄었다.

    지갑이 얇은 중고생들만 넘쳐나다보니 상인들은 장사가 안된다며 울상을
    짓고 있다.

    까페들도 바다를 볼 수 있는 창가가 아니면 자리가 텅텅 비어있다.

    이곳에서 5년째 장사를 해온 횟집주인은 "근래들어 대부분의 음식점
    매출액이 몇년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상당부분의 음식점과
    까페들이 철수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삼오오 때를 지어다니며 눈요기거리를 찾던 젊은패들이 발길을 돌리는
    곳이 거리 뒷편의 놀이공원.

    월미도만의 독특한 놀이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발디딜틈이 없을
    정도로 종일 북적댄다.

    간담을 서늘케 하는 놀이기구 자체보다는 어쨌든 작위적인 놀이문화가
    존재하기 때문.

    그래서 놀이기구를 타거나 줄을 서는 사람보다 둘러서서 구경하는 인파가
    훨씬 많다.

    입담 좋은 DJ와 중학생들로 구성된 댄싱팀이 흥을 돋구며 구경꾼의 발길을
    붙들어맨다.

    소위 "고삐리 문화"가 득세하며 월미도 특유의 색깔이 사라지고 있다.

    인천시가 지난 89년부터 문화의 거리, 예술의 거리, 풍물거리, 만남의
    장소 등으로 특성을 부여하며 기울여온 노력도 빛이 바랜 느낌이다.

    평일 2만~3만, 주말 5만에 달했던 방문객수도 점차 줄고 있는 실정.

    "월미도가 근사하다고 해서 들렀는데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곤
    특색이 없습니다.

    놀이공원에서 들려오는 소음으로 정신은 산만하고 거리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포장마차 뿐이라 너무 밋밋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울에서 온 신정희씨(여).

    그녀는 외국의 명소처럼 지역의 토속음식을 파는 포장마차를 유치하는
    것도 거리에 색깔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손성태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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