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쿠바가 낳은 유일무이한 세계적인 대기업의 사령탑일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대단한 장수회장이다.
오너가 아니면서도 81년이후 회장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선이 굵은 마스크를 가진 신사의 풍모.
여기에 젊은 날 겪은 예사롭지 않은 곡절은 그에게 큰 인간들이 가질 수
있는 "깊이"를 줬을 것이다.
그것은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느닷없이 헤쳐갔을 쿠바혁명의 곡절이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수학,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기만 하면 되던 그는
혁명의 와중에서 전재산을 몰수당한다.
그는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플로리다에 내리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영에서부터 시작되는 인생.
적성국출신으로 기업의 총수에 오른 그는 아마도 기다리는 인생을 알았을
것이며 이는 코카콜라의 경영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우선 홍보를 하더라도 브랜드가치의 극대화쪽으로 일관되게 정책을
유지했으며 유통과정등 그 효과가 당장 가시화되지 않는 쪽에도 투자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모든 역량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코카콜라는 청량음료만 제조하는
회사란 인식을 확실히 심어나갔다.
"기업에는 수명이 없습니다.
사람과 다른 부분이지요.
나는 코카콜라야 말로 1백10년이나 된 "젊은 브랜드"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끊임없이 브랜드의 젊음을 유지시키는 전략중 하나가 올림픽무대의
활용이었다.
지난해 올림픽은 코카콜라의 본거지가 있는 미국 애틀랜타를 무대로
펼쳐졌다.
그러나 코카콜라는 올림픽이 이곳에서 개최됐다 해서 지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를 절호의 기회로 삼아 애틀랜타 올림픽을 코카콜라 올림픽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는 코카콜라가 벌써 수십년전부터 국제대회를 브랜드홍보의 장으로
활용해왔다는 점에서도 분명해진다.
자그만치 2억5천만달러(약2천억원)를 지원한 "애틀랜타전"은 세계최고
브랜드 코카콜라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코카콜라올림픽이란 테마파크외에 자신들의 박물관(월드오브코카콜라)등을
설치하는데 들어간 자금이다.
특히 경쟁사인 펩시가 강력한 홍보전략을 구사하고 나섰을 때 이에
휩싸이지 않고 상품의 유통단계를 자신의 수중에 넣는 전략으로 맞선 것은
고이주에타 회장의 경영승리로 받아들여진다.
당장에 효과가 가시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 각지에 콜라를 완제품으로
만들어 내보내는 병마개(보틀러)회사를 장악한 것은 코카콜라에 장기간의
승리를 안겨줄 것으로 세계시장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그는 코카콜라가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와인사업 영화사업등으로부터
손을 떼 철저히 감미음료시장으로 경영자원을 집중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한때 사업영역의 확대를 꾀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해당업계에서 3위안에도 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빨리 철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업은 투자를 아끼지 않은 주주들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수익을 줘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취임한 81년 43억달러였던 코카콜라의 자산가치는 지난해
약1천2백억달러로 늘어났다.
제너럴일렉트릭(GE)에 이어 두번째 규모로 엑슨 AT&T같은 석유메이와
전신전화회사를 능가해버린 것이다.
비록 잘못된 투자도 있었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경영자의
상사.
돌이켜보면 파란만장한 인생을 지나며 스치게 되는 길목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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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1931년 쿠바태생. 미국예일대 졸업
<>1954년 쿠바의 코카콜라보틀러사 입사
<>1959년 쿠바혁명으로 전재산을 몰수당함. 코카콜라 마이애미지사에
재취업
<>1964년 코카콜라본사에 부임
<>1966년 부사장
<>1980년 사장
<>1981년 회장겸 CEO(최고경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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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림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