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K 체스터튼은 "도둑질은 남의 재산을 더욱 존중하기 위한 행위"라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당국의 허가도 받지 않고 불법으로
발굴하는 도굴은 존중과는 정반대인 훼손 또는 파괴에 해당하는 행위다.

도굴은 대개 왕릉이나 부장품이 많은 후장자의 무덤을 대상으로
행해진다.

이러한 예는 기원전의 기록에 나타나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왕들의 시신을 안치한 피라미드에 교묘한 미로를
만들어 놓았는데도 도굴꾼들의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역대 왕들은 도굴의 방지에 절치부심했다.

기원전 1500년경 투트메스 1세는 1천7백년동안 계속되어온 피라미드의
건설을 중단하고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산골짜기 (룩소르의 "왕들의
계곡")의 절벽에 굴을 파 왕들의 시신과 부장품을 매장했다.

이 암굴 묘를 설계한 건축가 이네니는 자신의 묘시명에 "그것은 위대한
작품이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도굴꾼들은 그 암굴묘도 찾아냈다.

왕묘를 관리하던 승려들은 생각끝에 야음을 틈타 암굴묘에서 왕들의
시신과 부장품을 꺼내 산골짜기 절벽 너머의 깊은 바위틈 밑에 뚫린
지하굴속에 넣은 다음 입구를 감쪽같이 봉해 버렸다.

그 굴은 3천년동안이나 베일에 가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1880년대에 도굴되고 말았다.

한국에서도 예로부터 도굴을 엄히 다스렸다.

조선시대에는 발총률을 제정하여 처벌했다.

1868년 (고종 5)에 독일인 E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생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다 미수에 그친 일도 있었다.

왕릉등 고분 도굴은 특히 일제 강점기에 심했다.

그때 많은 문화재들이 개인의 수중에 들어가거나 해외로 밀반출되었다.

광복후에는 1963년의 현풍 도굴사건과 66년의 불국사 석가탑 내부유물
탈취기도사건이 유명하다.

고구려인들의 생활상과 정신.예술세계를 생생히 보여주는 중국 집안의
장천 1,2호 고분내 벽화들이 지난해 8월 도굴당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

지상에 드러나 있는 고분이라 도굴꾼들의 손길을 피할수 없는 취약성이
있긴하지만 중국 당국의 관리허술을 탓할수 밖에 없는 사건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