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홍 <서울시립대 객원교수>

한국경제가 추락하다가 추락하다가 땅에 떨어졌다.

김영삼 정부의 신뢰성과 도덕성이 땅에 떨어지며 한국경제도 같이 땅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희망이 없다고들 말한다.

한보사태는 경제적인 측면도 있지만 정치논리에 따라 빚어진 사건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한보사태이후 더욱 이반된 국민감정은 김영삼정부나 신한국당에 대한
실망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국민들은 여당과 마찬가지로 야당에게도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한보사건은 정치와 정치인들 모두를 참으로 부끄러운 집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한보사건은 새로운 정치를 창출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정부(정치)와 경제의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제 땅에 떨어진 정치와 경제가 다시 비상할 수 있게 해야한다.

한보사건이 김영삼정권 초기에 터져 나왔다면 그 영향은 확실히
큰 다이나마이트의 폭발음을 내었을 것이고 개혁은 더 심도있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시지탄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한보사건을 계기로 전기를 잡아
문민정부의 개혁이 유종의 미를 거둔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올들어 금융개혁의 바람이 일고 있다.

한보그룹과 같은 부실기업과 정치권을 연결해주던 고리가 은행이었다.

우리나라의 금융기관은 정치논리에 휘말릴때마다 기업에 생산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금융감독기관들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채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수동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한국경제의 추락과 난파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완전한 실패를
의미한다.

대통령과 경제관료는 경제가 땅에 떨어진 책임을 경제인들에게 돌릴
수 없게 됐다.

물론 경제인들도 전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김영삼정부의 경제정책은 기업들의 탈 한국러시라는 현상이
말해주듯 기업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국내보다 경영여건이 낳다고 판단해 영국 프랑스 독일 동유럽
동남아 등으로 진출한 기업가운데 해외에서 이익을 내고 있는 회사는
별로 없는 것같다.

국내 기업들이 이익을 내기위해 외국에 세운 공장에 얼마나 많은 돈을
퍼부어야 할 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문민정부의 개혁은 과거로 소급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고
진행됐어야 하는데 법의 정신마저 어기면서 과거를 파들어가기만 하다가
결국 땅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미국경제가 안정돼 있는 것은 통화정책을 만들고 있는 연방준비은행이
제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방준비은행은 미국의 중앙은행으로 미국경제 전체를 조망하며 물가및
임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연방준비은행 총재와 이사들은 15년 임기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상원의
인준을 받는다.

15년 임기는 연방준비은행이 정치로부터 독립된 기구라는 것을 뜻한다.

연방준비은행 그린스펀 총재는 클린턴대통령에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반면 지금까지 한국은행총재 금융통화위원들은 대통령의 눈치만 살피는
신하로서의 역할에만 관심을 쏟아왔다.

경제지도자들은 정치지도자들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경제체제를 만들어 가는 첩경이다.

한은총재 금융통화위원회 위원들이 "노"라고 말할 수 있다면 경제는
정치논리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통화정책은 재정정책보다는 그래도 낳은 편이다.

재정정책은 정치의 입김이 그대로 작용되는 부문이다.

특히 재정정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조세및 예산부문은 정치입김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다.

문민정부의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은 경제주체의 또 한축인 가계부문의
소비및 저축패턴을 바꿔 놓았다.

국민은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소비지출을 줄이지 않고 있으며 특히
해외여행에 많은 돈을 쓰고 있다.

한국인들은 돈 잘쓰는 국민들로 해외에 알려져 있다.

알뜰살뜰 저축하기보다는 돈을 쓰기에 바쁘다.

돈의 가치가 안정되지 않은 나라의 국민은 돈을 모으기보다 우선 쓰고
본다.

그것이 한국경제를 추락하게 했고 땅바닥에 곤두박질하게 했다.

무역적자 2백억달러, 총외채 1천억달러를 넘어선 한국경제는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이제 땅에 떨어진 정치와 경제는 더이상의 후퇴를 용납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높은 물가가 높은 임금을 재촉하고 높은 임금은 다시 높은 물가를 부채질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높은 임금과 높은 물가를 지닌채 한국경제는 비상할 수 없다.

무거운 돈을 달면 날개는 부러질 수 밖에 없다.

새 봄이 오고 있다.

새로 빚은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정치는 더이상 경제를 혼돈에 빠지지 않게 해야한다.

새봄에 경제의 독립을 보장할 안전장치와 경제의 품위를 지킬 수 잇는
기업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최적기여야 한다.

정치가 경제를 유린하지 않는다면 우선 한국경제는 비상할 수 있다.

정치가 우리경제를 망쳤다고 한탄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