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읊고 있는 제문은 이제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언급을 벗어나
괴기한 죽음의 세계를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서풍이 몰아치는 날에 오래된 절이 불길에 휩싸이고 해가 져 어두운
언덕에는 해골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네.

느티나무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깡마른 쑥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안개가 자욱이 덮인 들판 너머에서 원숭이들이 우짖고 저 멀리 연기가
피어나고 있는 둔덕에서는 귀신들이 울고 있네.

붉은 휘장 속에서 님과 나누던 깊은 정, 황토 무덤 속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네"

보옥은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목소리를 새롭게 가다듬어
청문의 죽음으로 인한 자신의 슬픔을 고사를 빌어 노래하였다.

"한나라 때 장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인 범식이 여남으로
달려갔네.

범식이 오기 전까지 꼼짝도 하지 않던 장소의 관이 범식이 부등켜안고
통곡하자 움직이기 시작하였네.

진나라 때 석승의 녹주와 정을 나누던 재택 금곡원 연못이 석승의
눈물로 가득찼도다.

옛날 엽법선은 혼을 불러 비문을 쓰고 이장길은 하늘로 불리어 가 기문을
지었다고 하나, 이 옥은 그저 이렇게 제물을 차려놓고 제문을 짖는도다.

하지만 엽법선의 마음, 이장길의 마음과 이 옥의 마음이 매 일반이라"

보옥의 두 눈에 눈물이 더욱 고였다.

보옥은 머리를 들어 마치 청문이 황천길로 들어서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창창한 저 하늘에 옥룡 타고 노니는가.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기성, 미성 두별을 타고 황천길에 오른다고
하던데 그대는 벌써 그 별들을 올라탔는가.

봉황새가 끄는 수레바퀴 소리 삐걱삐걱 하늘 가득히 올리고, 그대의
패물에서 풍기는 짙은 향기에 별들마저 취했도다.

초생달을 귀고리 삼고 은하수를 너울 삼아비단 삿갓 쓰고 오색 치마
입었도다.

그대 황천가는 길 울긋불긋 깃발들이 늘어섰네.

황천 가는 그대 모습 아무리 화려해도 그대를 보내는 이 슬픔 달랠 길이
없어라.

통곡하고 통곡해도 그대의 발길을 이승으로 돌릴 수는 없도다.

이제 그대는 몽롱하고도 고요한 존재가 되었으니 그대 비록 이승으로
돌아온들 이 옥이 알아볼 수 있으랴.

아, 연꽃 가득히 핀 연못 위로 안개비는 저리 내리고, 바람 불어 먼지와
티끌 깨끗이 걷어가니 별빛 영롱하고 저기 보이는 계곡고 산들이
선명하도다.

사람은 빈산에서 말을 하고 공기는 대숲에서 바람을 일으키도다.

새는 놀라서 흩어져 날아가고 고기는 물을 씹어 소리를 내도다.

이 옥의 슬픔을 제문에 담아 그대를 추모하노니, 오호라, 슬프고
슬프도다. 또 슬프도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