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만난 연극배우 한명구(36)씨는 평소의 깔끔한
모습과 달리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예악당 개관 기념작으로 22일~12월2일 공연되는 음악극 "세종 32년"
(정복근 작 한태숙 연출)에서 맡은 세종역을 잘 소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

"수염을 붙이고 대사를 하려면 여간 불편하고 신경쓰이는 게 아니에요.
독백을 비롯해서 말을 많이 해야 하거든요"

"세종 32년"은 극작가 정복근씨가 10년전부터 구상해온 작품.

세종과 세조의 갈등을 중심축으로 이땅에서 무수히 되풀이된 보수와
진보의 대립문제를 다룬다.

또 찬란한 업적뒤에 가려진 인간 세종의 자기 희생과 고뇌에 초점을
맞춘다.

자연히 한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토속적이고 강렬한 역만 해온 저에게 "폭군 연산"이 아닌 "세종"을
하라고 했을 때 좀 망설여졌습니다.

세종의 삶이 드라마틱하지 않고 재미 있을 것 같지도 않았거든요"

대본을 읽고 세종이란 인물을 연구하는 동안 늘 웃고 인자한 "박제된
성군"보다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불행했던 한 인간의 모습이 크게
다가왔다고.

세종이 학문과 음악에 심취했던 것도 개인적 고충을 덜기 위해서가
아니였겠냐고 진지한 해석을 내린다.

"스스로에게 묻고 되뇌이는 장면을 통해 끊임없이 세종의 심정을
표현해야 합니다.

극이 제대로 살아나려면 내면연기의 극치를 보여줘야 하는 만큼 어깨가
무겁습니다"

극단목화 소속으로 84년부터 무대에선 한씨는 "아프리카" "필부의 꿈"
"덕혜옹주" "끽다거" "돌아서서 떠나라" 등 20여편에 출연했고, 87년
서울연극제연기상 92년 동아연극상연기상 등을 수상했다.

< 송태형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