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단풍이 곱게 물들고 노란 국화가 피는 음력 9월9일이면 옛 선비들은
국화떡과 국화주를 지고 산에 올라 시를 지으며 하루를 즐겼다.

단풍놀이와 시회를 겸한 풍류색 짙은 연례행사였다.

이 날을 양이 겹쳤다는 뜻으로 "중양", 또는 9가 겹쳤다는 뜻으로
"중구"라고 불렀다.

3월3일, 5월5일, 7월7일이 다 "중양"이겠으나 "중양"이라고 하면 9월9일,
즉 "중구"를 가리킨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명절이 됐지만 "중양"은 음양철학에서 유래된
중일명절 가운데 대표적 명절이었다.

"국화를 처음 거두어다 둥근 떡을 구워놓고/상낙주를 새로 걸러
술지게미를 짜냈다. /붉은 잎 가을 동산에 아담한 모임을 이루었으니,
/이 풍류가 억지로 등고놀이 하는 것보다는 낫다"

조선 철종때의 선비 유만공이 19세기 중반에 펴낸 "세시풍요"에는
이처럼 "중양"의 풍속을 멋들어지게 그린 시 한 수가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한대이래로 이 날이 되면 새로 핀 국화를 보고(상국)
산에 올라(등고) 시와 주를 즐겼다.

당송대에는 추석보다도 이날이 훨씬 더 큰 명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때부터 매년 이날에는 안압지의 임해전이나
월상루에 군신이 모여 시가를 즐겼다.

고려때는 "중양"의 향연이 국가적으로 정례화 돼 있었다.

조선에서는 세종때 "중삼" (3월3일) "중구"를 명절로 공인했으며,
성종때는 조정의 원로들을 위로하기 위해 추석에 열던 기노연을 "중양"으로
바꾸어 베풀었다.

특히 이날은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과거를 보았는데, 이를 "국제"라고
불렀다.

"동국세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서울 풍속에 남산과 북한산에서 이날 마시고 먹으며 즐긴다.

이는 등고의 옛 풍습을 답습한 것이다.

청풍계 남한산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등이 단풍구경하는데 좋다"

임금도 이날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세검정근처에 있던 탕춘대에 올라
단풍을 구경했다니 "중양"에는 역시 단풍구경이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어제는 "중양"이었다.

설악산의 단풍이 절정을 이루어 올가을 최대의 단풍관광 인파가
몰렸다는 소식이다.

이달말 쯤이면 서울근교의 산들도 온통 붉게 물들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든 짬을 내어 서울근교의 산에라도 올라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단풍의 함성을 들으며 복잡한 세상사를 잠시 잊는 것도 좋을성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