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사연이 있길래 네가 스스로 말하기 곤란하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소지를 올려 명복을 빌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나에게
일러주면 상노아이들을 시켜서 소지용 종이주머니를 사다가 거기에
이름을 써서 태우도록 해주겠어"

보옥이 두 눈에 눈물이 아직도 고여 있는 우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말씀만 들어도 고맙고 황송합니다. 그럼 이만."

우관은 보옥을 어려워하며 주뼛주뼛 물러갔다.

보옥은 우관에게 필시 숨은 사연이 있음을 직감하며 그 사연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빨리 방관이나 예관을 만나 우관의 사연을 물어보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보옥이 소상관으로 가서 대옥을 만났다.

"몸이 좋아졌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대옥이 보옥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반가워 하였다.

"대옥이 정말 소주에는 내려가지 않는 거지?"

보옥이 그 사실부터 확인하자 대옥이 웃음을 터뜨리며 보옥을
안심시켰다.

"내가 소주에는 왜 내려가요? 친척 되시는 임씨 어른들은 이제는
천하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소주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요.

내가 죽어 아버님 묘 옆에 묻히려 내려가면 모를까"

"무슨 그런 불길한 말을"

보옥이 황급히 대옥의 말을 막으며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바꾸었다.

보옥이 대옥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홍원으로 돌아와서 방관을 찾았다.

마침 방관은 머리를 감으러 양어머니에게로 가고 없었다.

그런데 방관의 양어머니는 자기 딸의 머리를 감겨준 물로 방관의 머리를
감기려고 하였다.

그러자 방관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내 월금을 달마다 꼬박꼬박 챙겨가면서 왜 나를 항상
뒷전으로만 미루어놓는 거예요? 지금도 보세요.

이런 물로 내 머리를 감기려고 하다니"

"이 물이 어때서 그래? 물을 길어 오는 일이 보통일이 아닌데 한번 씻고
버리면 아깝잖아.

매사에 아낄 줄을 알아야지. 그리고 뭐? 내가 네 월급을 다 가로채
간다고?

이년이 연극쟁이로 있던 것을 빼내어 출세를 시켜주었더니만 은혜도
모르고 망발을 해?

보옥 도련님 시중 드는 일이 얼마나 존영스러운 일인지 알기나 해?

출신이 나쁜 년들은 아무리 도와줘도 소용이 없다니까"

방관의 양어머니가 도리어 큰소리를 치며 방관을 나무랐다.

습인이 보옥의 심부름으로 방관을 찾으러 왔다가 이렇게 싸우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