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해안에는 예로부터 해적들이 끊임없이 준동해 왔다.

동지나해로부터 남지나해로 뻗은 해안은 들쭉날쭉한데다 섬이 많아
해적이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정치의 부패와 타락이 극심한데 따른 사회 혼란기와 내란기,왕조
교체기에는 해적의 활동이 더욱 활기를 띠었다.

진.한나라때에도 산동과 강소의 연안에 해적의 활동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후한서"에는 서기109년 해적 장백로가 붉은 두건에 붉은 옷으로
치장하고 장군이라 자칭하면서 3,000여명의 휘하를 거느리고 해안을
휩쓸었다고 되어 있는가하면 "삼국지"에도 해적이 절강을 제압했다고
되어있다.

그뒤 당.송.원.명.청대로 내려 오면서는 그 근거리가 복건.광동의
남지나해 연안으로 옮겨졌다.

당시의 해적들은 해상의 약탈에 그치지 않고 연안의 항구와 도시를
습격했는가하면 하구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 내륙 깊숙이까지 침입하기도
했다.

당나라때는 해적의 출몰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초토해적편을 두는
한편으로 회유책으로 해적의 우두머리에게 관직이나 이권을 주기도
했다.

몽고인들의 정전인 원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온 남송에서는 그 회유책이
도가 지나쳐 "관리가 되려면 도적의 수령이 되라"는 말까지 떠들 정도였다.

"원사"에는 세조 재위시에 해적 하문달이 노략질한 부녀자 130여명을
그들의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해적의
약탈대상은 재화뿐만 아니라 사람도 가리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걸쳐서는 일본의 해적인 왜구의
출몰이 극심해졌다.

명나라 후기의 왜구에는 중국인 세력도 상당하여 개중에는 연해안
민중의 반관 반전력 투쟁의 투쟁의 일환으로 볼수있는 것도 있었다.

가정 연간에는 왜구침입의 대환란을 겪는 일까지 일어났다.

해적은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명맥이 이어졌다.

중국 해적사를 장식한 두목으로는 동진의 노순, 당의 약방, 송의 장선,
원의 방국진, 명의 왕직 서해 장련 임봉 증일본 정지룡, 청의 채견 등이
유명하다.

최근 중국 선박들의 한국 어선에 대한 "해적행위"가 잇따르면서
서해가 "공포의 바다"로 변하고 있다.

그동안 사라졌던 지나해의 해적이 다시 나타날 조짐인지 걱정스럽다.

역사적 전환의 수레바퀴를 다시금 되짚어 보게 하는 일인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