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창부 같은 년! 너 같은 년들 때문에 순진한 도련님이 못쓰게
되는 거야"

왕부인이 금천아를 향하여 호통을 치자 금천아는 그만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금천아가 생각할 때는 별로 잘못 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아무튼 무조건
빌고 볼 일이었다.

"마님,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이런 소동이 벌어지자 졸고 있던 시녀들이 깨어나 우르르 몰려들었다.

보옥은 어머니 왕부인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기 전에 얼른 줄행랑을
쳤다.

"옥천아야"

왕부인이 금천아의 동생인 옥천아를 불렀다.

옥천아가 놀란 표정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왕부인 앞으로 나왔다.

"너, 지금 당장 네 어미에게 가서 네 언니를 데리고 가라고 해라"

금천아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10년동안이나 왕부인을 섬겨왔는데 보옥의 수작을 받아주다가 그만
쫓겨나다니 억울하고 분통할 일이었다.

왕부인의 입장에서는 금천아의 죄가 그리 크지 않다고 하더라도
시녀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시범적으로 혼을 낼 필요가 있었다.

금천아가 울고 불며 왕부인에게 매달렸지만 왕부인의 결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결국 금천아의 어머니 백씨가 와서 금천아를 데리고 갔다.

금천아는 말할 것도 없고 금천아를 배웅하는 시녀들이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한 시녀를 순식간에 쫓겨나게 한 보옥은 자기가 한 짓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별로 없이 왕부인의 방에서 빨리 도망쳐 나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대관원 정원 길을 걷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곳을 따라
걸어가다가 장미꽃밭에 이르러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매미소리만 요란하게 들리고 사람들의 그림자는 일절 보이지 않는
그 곳에서 난데없이 여자의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에 이런 비슷한 장소에서 대옥의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지라
보옥은 또 대옥이가 우나 하고 귀를 기울였으나 이번에는 다른 여자의
울음소리였다.

보옥은 장미꽃밭 울타리 틈새로 울고 있는 여자를 찾아보았다.

갖가지 색깔로 무성하게 피어난 장미꽃들 속에 한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비녀로 땅바닥에다 무슨 글자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글자는 바로 장미 할 때 장자였다.

왜 저렇게 흐느끼면서 장미꽃 그늘에 앉아 장자를 쓰고 있는 것일까.

보옥은 궁금증이 일어나 견딜 수 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