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은 앵앵이 편지에 쓴 시의 내용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이자
당황해 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앵앵이 장생으로 하여금 방에 앉도록 하더니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오라버니 덕분으로 우리 집안이 난리통에도 무사하게 된 것 잘
알아요.

어머니도 늘 우리 남매에게 말씀하시죠. 그분을 오라버니로 깍듯이
모시고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도록 하라고.

그런데 오라버니는 엉뚱한 마음을 품고 우리를 곤경에서 구해주셨군요.

사실은 홍랑이를 통해서 오라버니의 편지를 받고 아무 답장도 해드리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러면 혹시 오라버니께서 제가 오라버니의 마음을 받아들였다고
오해하실 것 같아서 홍랑이 편에 몇자 적어 보내 뵙자고 한 거였어요.

그러니 오라버니, 저에 대하여 음탕한 마음을 품지 마시고 그냥
오라버니로 지내주세요"

그리고는 앵앵이 장생의 말을 들어볼 생각도 않고 휑하니 방을 나가
버렸다.

엉뚱한 마음, 음탕한 마음이라고?

장생은 얼떨떨한 중에도 순간적으로 화가 나고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앵앵이 편지에서 "날 찾아오는 낭군" 어쩌고 한 것은 단지 사람을
유인하기 위한 허언에 불과했단 말인가.

장생은 혼란한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다시 담장을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가만히 더듬어 보니 사내 대장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창피하고 분통해서 그냥 죽어버리고만 싶었다.

그는 평소에는 잘 마시지 않던 술을 낮이고 밤이고 퍼마시며 절망
속에서 며칠을 보냈다.

어떤 때는 친구들을 따라가서 아무 여자하고나 자버릴까 싶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밤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 장생의 귀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도둑이라도 들어왔나 하고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열고 내다보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홍랑이 한 팔에 베개를 끼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네가 이 밤에 웬일이냐? 그 베개는 또 무엇이고?"

처음에 장생은 홍랑이 정씨 집을 도망쳐 나와 자기에게로 피신온 줄로
생각했다.

"아씨께서 오실 거예요.

방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계세요"

그러더니 홍랑이 장생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 머리에 놓여 있는 장생의
베개 옆에 자기가 가져온 베개를 놓고는 총총히 돌아갔다.

아씨께서 온다니? 그럼 저 베개가 앵앵의 베개란 말인가.

장생은 꿈을 꾸고 있는가, 술을 너무 마셔 환각에 빠져 있는가 하고
팔을 꼬집어 보기도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