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나긴 어딜 달아나? 그거 내놓지 못해?"

가련이 평아를 쫓아가 넘어뜨리고는 머리카락 뭉치를 쥐고 있는 손목을
비틀었다.

평아는 있는 힘을 다하여 주먹을 움켜쥐면서 버티었다.

"제가 왜 이렇게 와서 주인 어른님께 이 머리카락을 먼저 보여드리는지
아세요?

제 마음을 아시느냐 말이에요? 그건 주인 어른님이 곤란한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려고 그랬던 거예요.

제가 주인 마님에게 이 머리카락을 먼저 보여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알아. 네 기특한 마음 내가 잘 안다니까. 그래 무얼로 감사하지?"

그렇게 한편으로는 평아를 달래면서 가련은 평아에게서 머리카락 뭉치를
빼앗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다 보니 가련이 평아를 완전히 깔고 앉은 꼴이 되고 말았다.

평아의 허벅지가 가련의 사타구니에 눌려 있는 형국이었는데, 주책없게도
그런 순간에 가련의 음경이 슬금슬금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평아도 그 감촉을 느끼는지 머리카락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상체를
뒤틀며 몸부림을 치다가도 그만 한숨을 푸욱 쉬곤 하였다.

그때 희봉이 돌아오는 기척이 들려왔다.

가련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워 황급히 두 손으로 옷을 매무시하였다.

평아도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손에 쥐고 있는 머리카락 뭉치를 소매
속에 다시 감추고 자기 머리를 매만졌다.

희봉이 방으로 들어서면서 평아에게 물었다.

"바깥 서재로 나갔던 물건들 모두 옮겨 놓았니? 그동안에 없어진 것은
없고?"

"네. 다 옮겨 놓았어요. 없어진 물건도 없고요"

평아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없어진 물건이 없다니 다행이구나. 그런데 그동안에 늘어난 물건은
없더냐?"

희봉이 미소를 머금은 채 가련을 흘끗 쳐다보았다.

가련은 평아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기다렸다.

"대감님이 새 물건을 산적도 없는데 늘어난 물건이 있을리 있겠습니까?"

평아의 대답에 가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늘어난 물건이 없는 것도 다행이구나"

하지만 희봉의 얼굴에는 늘어난 물건이 없을리 없지 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희봉은 평아에게 버선본을 찾아보라고 하더니 평아가 그것을 가져오자
그 버선본을 대부인에게 갖다 주러 다시 방을 나갔다.

평아가 눈에는 웃음기를 가득 담고 입술을 실룩이며 가련에게로
익살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저에게 무슨 상을 내리겠어요?"

"이런 상을 내리지"

가련이 평아를 와락 껴안고 볼을 비벼댔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