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예순닷새의 마지막날.

또다시 헛날을 잉태한 그 끝자락의 날에 서서 한해를 되돌아보고 넘겨
보아야 할 이 순간에 인생을 바쳐 매달려온 춤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춤이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육체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
이라고 한다.

생각이나 사상 또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모두 춤으로 형상화될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오롯한 예술작품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뇌와 고통의 과정을 거쳐 여과되고 정제되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여로에서 어쩌면 당연히 만나야할 자연의 섭리에
눈뜨기 시작했다.

단 하나의 물방울과 한결의 바람,강렬한 햇살과 스러진 달빛이 숨을 트고
죽이는 생동의 조화에서 생명의 숨을 내쉬고 들이키는 자연이 곧 삶의
모습이요, 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지극히 토착화된 동양적 자연사상인 기의 수용과 수련을 바탕으로
시공을 초월한 간결하고 함축된 영혼의 감성을 육체의 언어로 승화시키는
과정이 춤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지난 십수년동안 이 춤을 찾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그 결과 한계를 모르는 자연의 조화와 육신의 깨우침을 통해 삶의 가치를
조명하는 이 춤을 완성하는 그릇을 일컬어 "생춤"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므로 생춤은 우리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알고 또 자연의 반추를
통해 삶의 가치를 조명하는 지극한 자연사상과 기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는 춤이라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위해 살아 움직이는 생명과 창조의
혈관이다.

그 흐름은 때로는 움직이고 때로는 멈추는 과정을 반복하는 가운데 무의의
숨을 쉰다.

그러나 기가 춤의 에너지이고 우리 몸의 자각을 요하는 근원적인 동인
이기는 하지만 기가 곧 춤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기가 우리몸이 지니고 있는 자연으로서의 한 현상이고 그 운용과
원리가 예술창조에 있어 창작의 근간을 이룰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창작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창작이라는 개념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개성이며 이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성의 표출이다.

개성은 타고난 천성과 함께 환경과 끊임없는 교감과 조화를 통해 개개인의
인성을 더욱 고양시킨다.

그러므로 이 개성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예술의 꽃을 피우는 생명이요,
원동력인 것이다.

오늘날 시대와 지역의 벽을 허무는 지구촌의 예술이라는 꽃들도 서로 다른
토양과 자연환경, 민족마다 색다른 체질과 이질적인 언어, 그들이 추구하는
신과 다양한 희로애락에 대한 표현이요, 자각이다.

이러한 판이한 문화환경에서 자라난 문화예술이 곧 이 세상의 꽃밭을
풍요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웅장한 그랜드캐니언과 끝없는 사하라사막의 시공, 그리고 이집트의
황량한 골짜기와 야자수 무성한 남국의 정취속에서는 결코 애환과 풍류와
신명이 넘치고 한의 깊이가 서린 우리의 예술혼이 뿌리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토양을 버리고 모든 환경적 바탕을 무시해 버린다면
결코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예술은 기대할수 없다.

어떤 형식이나 의지의 발로이건 예술은 그 독창성에 대한 선택과 용기를
요구하며 그 바탕은 스스로의 사상과 인식을 자각한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다.

많은 예술장르 중에서 굳이 춤을 선택한 것이 고유의 용기라면 숱한 춤의
유형 가운데 오직 생춤의 세계를 고집하는 것 역시 나의 독창적인 자유이며
용기일까.

자유롭고 진솔한 몸의 언어를 찾는 길은 외롭고 고독하기만 하다.

더구나 그 탐구의 끝은 알 길이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