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은 중국 역사상 가장 영명한 군주의 대표로 꼽히는 이이다.

그래서 그가 다스리던 시기의 정치를 정관지치라 하여 이상적인 정치
형태로 꼽고 있다.

"정관정요"가 후대 제왕학의 지침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일찌기 부친인 고조이연을 도와 당제국을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지만 둘째 아들이었기에 형인 은태자 건성에게 태자 자리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야심 만만하였던 그는 드디어 태자와 동복 막내 아우인 원길이
자신을 제거하고 모반하려 한다는 트집을 잡아 이들을 쏘아 죽이고 부황으로
부터 제위를 물려 받는다.

그러나 태종 자신에게도 자신이 제위를 탐해 형제를 살해하였던 과보가
찾아들게 되니 정후인 문덕왕후 장손씨소생의 네 아들을 비롯 14왕자가
제위를 탐하여 불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철하였던 문덕왕후가 불과 36세로 돌아가서 정후소생 왕자들을 다독여
화목케 할 수 없었던 것도 큰 원인이었지만, 장자인 태자승건보다 정후
소생으로는 둘째이며 전체로는 네째인 위왕 태가 태자를 훨씬 능가하는
재능을 타고 나서 늘 태자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의 불행을 자식들에게 되풀이 시키지 않기 위해 정후
소생의 막내 황자로 심성이 가장 유순하여 효친우애를 솔선하던 제9왕자
진왕치를 태자로 삼아 보위를 물려준다.

이를 적극 협찬한 이가 문덕왕후의 오라버니로 태자의 외숙이 되는 장손
무기이었다.

장손무기는 태종을 도와 천명을 받게 하였던 18학사 중의 하나로 태종의
이런 결정이 장차 화근이 될 것을 짐작하여 초기에는 몹시 꺼리었으나, 이
아이를 태자로 삼으면 남은 두 아들이 다 살지만 둘중의 하나를 세우면
하나가 죽을 것이라고 하는 태종의 회유에 생질들을 모두 살리기 위한
차선책으로 마지 못해 이에 적극 협찬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런 유약한 계승자는 결국 두 형을 모두 제명에 죽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측천무후와 같은 여걸에게 농락당하여 대권을 이에게
넘겨주니 당태종이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세워 놓은 당 제국은 한동안
국호마저 빼앗기는 불행을 겪게 되고 그 와중에서 태종과 고종의 자손들과
일가 친척들은 거의 몰살당하는 참화를 입는다.

이런 불행을 예측하여 머뭇거리었다던 장손무기도 측천무후에게 그 일족과
함께 몰살당한 것은 물론이다.

당태종의 신산이 빗나간 뜻밖의 결과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