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본회의는 예산안처리 법정시한인 지난 2일 정부 원안에서 410억원이
삭감된 62조9,626억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표결 통과시켰다.

정국이 한치앞을 내다볼수 없을 정도로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겉으로나마
여.야간에 큰 마찰없이 예산안이 표결처리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느낌도 든다.

지난 93년과 94년에는 정부 여당의 예산안이 날치기로 통과되고 야당은
이를 육탄 저지하는 장면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의 급박한 정국에서 예산안처리마저 여.야가 극한 대립하면
국정에 대한 국민불안이 더욱 가중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산안통과에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년
예산안이 과연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하게 검토되었는지 의심하지 않을수
없다.

무엇보다도 나라의 살림살이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여야할 여.야 국회의원들
의 자세가 전혀 성실하고 진지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지난 6월말 지방자치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패하면서 내년 총선을 앞두고
올하반기 정국이 순탄하지 못하리라고 예상은 됐으나 노씨의 비자금 사건이
폭로되면서 정기국회는 정쟁으로 난장판이 됐다.

정치선진화, 정책정당 지향등 여.야의 다짐은 오간데없이 상대방을
헐뜯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아예 국회에 출석하지도 않은채 지역구 행사에만
바쁜 한심한 행동을 거침없이 했다.

정쟁과 내년 총선에만 신경을 쓰는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진지한 예산안
검토및 국민부담 경감을 위한 노력을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가망없는
일이었다.

예산 삭감규모가 410억원이라는 형식적인 선에 그친채 거의 정부 원안대로
확정된 것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내년도 예산안은 올해보다 14.9%나 늘어난 규모로서 총선을
의식한 팽창예산의 색깔이 짙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산규모가 늘어난데다 적자재정을 피하려다 보니 국민의 세금
부담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정국이 불안해 경기 하강추세가 빨라지고 공공요금 인상을
비롯한 물가상승이 계속되는데 세금마저 더내야 하니 내년 서민생활은
매우 고달플것 같다.

그럼에도 정쟁과 보신에만 눈이 어두워 소임에 충실하지 않은 국회의원들은
마땅히 국민의 엄한 책임추궁을 받아야 한다.

예산삭감 규모가 미미한 것말고 예산항목및 계수조정에서도 출신 지역구의
민원반영에만 급급한 구태가 되풀이됐다는 점도 지적돼야 한다.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990억원, 농어촌 지원사업에 1,039억원이 증액 배정
됐는데 이중 상당부분은 정치적 선심성격이 짙다.

또한 중소기업지원을 위한 신용보증기금 200억원 출연은 명분은 좋으나
방만하고 허술한 기금운영의 개선 없이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의 예산
낭비라고 할수밖에 없다.

이밖에도 관변단체 예산지원 41억원등 비생산적이고 반개혁적인 예산
배정이 삭감되지 않고 통과된 경우도 적지 않다.

여.야는 정치선진화와 정책정당을 말로만 내세우지말고 입법과 예산심의를
통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