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의 아버지 가정의 생일날이 돌아와 녕국부와 영국부 사람들이
모여 축하연을 벌였다.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지고 뜰에는 연극공연까지 벌어졌다.

그동안 진가경의 장례를 치르느라 침울했던 분위기들이 걷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쳤다.

이때 문지기가 헐레벌떡 축하연 자리로 뛰어들어와 숨이 넘어갈
듯이 가정에게 아뢰었다.

"대감님, 대감님, 저어."

"이 사람아, 숨을 쉬어가며 이야기 하게나. 도대체 무슨 일인가?"

사람들이 모두 문지기의 입을 주목하였다.

"육궁도태감께서 황제 폐하의 성지를 받들고 방금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무엇이라구? 황제 폐하의 성지라구?"

"육궁도태감이라면 후궁의 환관들을 다스리는 하대감이 아니냐.
그 분이 무슨 일로?"

가정과 가정의 형 가서 들이 깜짝 놀라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혹시 부지불식간에 황제 폐하에게 죄를 범한 것은 아닌가.

궁중에 황제 폐하의 공주를 가르치는 궁녀로 들어가 있는 보옥의
누나 원춘이 무슨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닌가.

"당장 연극공연을 중단하고 주안상도 물려라"

부랴부랴 자리를 정돈한 가정과 가서 들이 향안을 차리고 그 위에
향로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중문을 열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육궁도태감을 맞이하였다.

육궁도태감 하수충이 전후좌우에 많은 환관들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성큼 들어섰다.

그 위용이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하였다.

가정과 가서, 그리고 그외 가씨 가문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수충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수충의 손에 황제 폐하의 칙서 같은 것이
들려 있지 않았다.

문지기가 분명히 황제 폐하의 성지를 받들고 하대감이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수충은 처마 밑에 와서 말에서 내리더니 대청으로 올라와 남쪽을
향해 섰다.

남쪽을 향해 선 것은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어명을 전한다는 뜻이었다.

칙서 같은 것을 읽지 않고 그냥 구두로 전할 모양이었다.

가정과 가서 들은 바짝 긴장하여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흘끗 훔쳐본 하수충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쁜 소식은 아닐테니 일단 안심을 해도 될것 같았다.

"황제 폐하께서 임경전에서 가정 대감을 인견하시겠답니다. 대감은
입궐할 채비를 하시지요"

하수충은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말에 올라 총총히 돌아가버렸다.

황제 폐하께서 무슨 일로 부르시는지 물어볼 여유도 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