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자본시장에 진정한 의미의 채권브로커가 자리를 잡기시작한 것은
89년말께부터이다.

그전에는 채권브로커하면 강제소화 국공채를 개인들로부터 사들이는
채권수집상을 얘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수출호조로 달러가 유입되면서 시중에 돈이 넘쳐흐르자 정부는 통화
안정채를 대량으로 발행, 금융기관에 강제배정했다.

또 90년부터는 회사채가 대규모로 발행됐다.

채권시장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고 채권브로커의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됐다.

이전까지는 채권의 겨우 발행시장만 있었지 유통시장이 없었다.

회사채가 발행되면 주간증권사는 발행액의 절반은 투신에, 나머지는
발행기업에 떠넘기는게 관행처럼 여겨졌다.

자금조달을 위해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리턴물을 어떻게든 다시 팔아야했으나 뚜렷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회사채뿐 아니라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대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떠안은
양도성예금증서(CD) 개발신탁등도 BTC등 외국계은행을 통해야 팔수 있는
시대였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증권사들은 종합주가지수 네자리수시대를 구가하며
주식약정에만 급급했다.

제일증권 이경노채권부장(41)이 ''채권브로커의 황제''로 불리는 것도
남보다 한발앞서 채권브로커개념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채권을 사거나 팔고 싶으면 제일증권을 먼저 찾아가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채권중개기능을 강화했다.

금리 기간 금액등을 불구하고 돈을 빌려달라는 ''3불시대''에 채권유통기능을
강화해 자금시장의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제일증권입장에서는 중개수수료를 챙기는 한편 인수업무도 강화할 수
있는 이점까지 있었다.

지금이야 1백억원의 채권을 중개매매해야 판사람으로부터 1백만원정도의
''수고료''를 받는게 고작이지만 당시만 해도 몇천만원의 짭짤한 중개수수료를
챙길수 있었다고 한다.

서강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이경노부장이 제일증권에 입사한 것은 지난
82년.

한화그룹에 입사했다가 3개월동안 일본연수를 시켜준다는 유혹에
제일증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부가 자본자유화일정을 발표하는등 당시 상황이 증권사에 매력을
느끼게 했다.

처음에는 법인영업부에서 채권관련 업무를 했다.

채권을 이용한 기업대출(완매채)로 금리감각을 쌍고 돈을 만지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사귀기 시작했다.

주변사람들이 주식예기로 들떠있을때 이부장은 채권금리만 생각했다.

89년 채권부가 별도 부서로 생긴후 채권부장을 맡은 이부장은 후배브로커
를 양성하는데 주력했다.

브로커들에게 딜링업무를 맡긴 것도 이부장이 가장 먼저였다. 93년중순
께부터다.

이부장의 채권브로커 철학은 간단하다. 먼저 손해가 났건 이익이 발생
했건 3일이내에 채권을 되팔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첫째다.

물리지않기 위해서이고 자주 사고 팔아야 금리를 예측할 수 있다는
얘기다.

0.2%포인트 이상 물리면 자동적으로 파는 일종의 스톱로스시스템(Stop
Loss System)을 도입한 셈이다.

다음으로 이부장은 금리예측이 힘들면 채권을 보유하지 말것을 권한다.

금리등락에 관계없이 채권브로커가 살아남을 수 있는 철학을 강조한
것이다. 진짜 프로는 쉴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제일증권을 채권유통분야 1등회사로 키운 이부장은 탁월한 금리예측능력도
갖추고 있다.

지난 93년 4월과 94년 2월 금리상승기에 회사보유채권을 발빠르게 판것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93년에는 남들이 인수를 꺼리는 양곡증권(1천억원) 농지채권(6백억원)
등을 총액인수해 수억원의 이익을 회사에 안겨줬다.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이부장은 그래서 명브로커보다 탁월한 채권운용자로
기억되길 바란다.

최근에는 채권부 직원들을 미국 일본등 선진채권시장에 파견하는등
국제화를 서두르고 있다.

<이익원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