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사 건사 1,50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여니 꼭 와달라는 중국 사회과학원
황심천교수의 청을 받고 한 열흘동안 중국을 다녀왔다.

황교수와는 국내에서 한두번 만난 적이 있고 그때부터 알게 되어 중국에
와달라는 초청은 2,3년전 현 학술회의때에도 날아 왔었다.

이번이 두번째 간청이라 아무리 자비여행이라고는 하지만 중국과 중국불교
를 알고 싶은 마음이 나를 결국 거기까지 갔다 오게 만들었다.

나의 중국에 대한 호기심은 굉장히 오랜 옛적에 싹터 있었으나 국제 정치
정세가 이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중국의 문이 열리면서 어떤 교수는 벌써 설흔몇번이나 다녀 왔다는데
나는 금년 처음 한국천 종 스님들의 배려로 나의 첫번째 중국여행을 실현
하였다.

이제 두달쯤 된 마당에 다시 중국을 간다니 나도 여행복은 타고 난 것이라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내 나이를 생각하고 중국의 사정을 생각하면 일각도 늦출수 없는 것이
실정이었지만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제자 박군의 도움만을 믿고 단신
비행기를 탔다.

소림사의 회의는 등봉시 인민위원회 초대소에서 9월4,5,6일간 열렸고
기차표 국내 비행기표 일체가 무슨 이유에서 인지 주선이 안돼 하루를
더 묵으며 낙양과 소림사가 있는 숭악일대의 유적을 돌아 보고 다시 북경
으로 와 중국불교의 대부 조박초선생을 만났다.

내가 이 기간중에 만나 이야기를 나눈 상대가 아마도 50명은 넘을 것이다.

소림사회의에 온 전중국의 불교관계 학자 91명중 아주 젊은 석사과정의
학생들을 제외하면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에는 중국사회과학원의 원로
학자들 10여명과 북경과 지방의 각대학 교수들 중국불교협회의 임원들,
그리고 몇몇 지방의 종교국 과장들이 포함돼 있었다.

동시통역도 없는 전체회의나 분과회의에서 나는 중국사람처럼 중국어를
잘 구사하는 박군의 도움과 영어를 아는 두서너명 학자와의 직접대화로
회의에서 발표되는 논문의 내용과 토론의 진행상황을 대강은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중국선의 비조인 달마대사의 이입사행논과 금강삼매경과의 관계,
원효의 역할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대체로 중국학자들은 최근 15년 내지 20년동안에 육성된 학자들로서 아직은
국제적인 안목이 크게 열린 것같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매우 진지하고 성실한
연구자세가 돼 있는 것같았다.

중국에 가 있는동안 갑자기 시상이 많이 떠올랐다.

새벽에 잠이 깨면 끄적 끄적 희미한 불빛아래에서 서투른 글을 써 갔다.

북경에서 조박초선생댁으로 찾아 갔을때 나는 놀랐다.

그 소박한 인품에 그 소박한 삶이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했다.

선생에게 내 시가 적힌 수첩을 보였다.

소림객사야심정 재재논사개정중 명월하처관세음 찬찬진진개창정
천하대육광활처 유구불언하지치 금일개소심중의 만발백화동일색

소림의 객사에 밤은 깊고/재간많은 논사들도 정에 들었네/명월은 어디에서
세상 음성 듣는가/찰나마다 이세상 모든것 다 청정함을 노래하네/천하의
대륙 넓고 넓은 곳에서/입은 있어도 말은 안하니 어찌 그 값을 알꼬/오늘
마음속 깊은 뜻 활짝 꽃피우니/만발한 백화가 다 한결같이 아름답도다./

조박사가 한참 미소를 띠고 생각하더니 내수첩에 이렇게 적는 것이었다.

점화가엽소 호월조선심 감군은중의 래방도강인

가섭이 꽃을 들고 웃으니/밝은 달이 선심을 비추어/그대의 깊은 마음에
대답한 것일세/강 건너 찾아온 사람아/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