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은 이렇게 쉬지않고 철함사까지 장례 행렬을 따라가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살짝 행렬을 빠져나와 어디서 좀 쉬었다 가고 싶어졌다.

쉬었다 가더라도 말을 힘껏 몰기만 하면 위낙 느리게 나아가는 장례
행렬이라 금방 따라잡을 수도 있을듯 싶었다.

그래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인 한 사람이
달려오더니 희봉의 말을 전갈해주었다.

"가련 대감 마님께서 보옥 도련님더러 마님의 수레로 오시랍니다"

보옥은 희봉이 어떻게 자기가 엉뚱한 생을 하고 있는를 알았을까
속으로 뜨끄마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희봉 형수는 귀신같단 말이야. 보옥은 바다에서 나오는 쌍용무늬
비단띠로 묶고 은관을 쓴 머리를 겸연쩍은 듯 매만지며 그 하인을
따라 희봉의 수레 쪽으로 다가갔다.

"형수님, 나를 불렀습니까?"

"그래요. 그 말에서 내려 내 수레로 올라타요. 나도 심심하니까 같이
이야기나 하면서 가요"

"나는 말이 좋은데요"

보옥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느라 사양하는체 하였다.

"도련님은 지체 높은 신분인데 말을 타고 가는 것이 어울리지 않아요.
꼭 말잔등에 붙은 원숭이 같아요"

희봉이 은근히 모욕을 주자 보옥은 그만 얼굴이 벌개져서 말에서 내리더니
희봉의 수레에 올라탔다.

희봉과 보옥은 수레에 나란히 앉아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나누었다.

"형수님, 내 서재 도배를 언제 해주어요? 빨리 도배를 해야 안정된
마음으로 공부를 할텐데"

"도련님 서재 도배를 새로 해야 된다면서 도배지 값을 얼마전 타갔는데,
아직 안해준 모양이죠?"

"형수님이 일꾼들을 재촉해줘요"

"내가 재촉한다고 되나요. 다른 일들이 밀려서 그러겠지요. 나보다도
더 그 사람들이 도련님 서재 도배를 빨리 해주고 싶은 마음일 거예요.
그래야 필요한 물품이랑 품삯을 받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근데 가련 형님은 언제 오시는 거죠? 소주에서도 대옥 아버님 장례가
길어지는 모양이죠?"

"그라게 말이에요.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세상을 떠나가니 마음이 착잡하군요. 갑자기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보옥 도련님은 좋겠어요"

"아니, 왜요?"

"이제는 도련님이 좋아하는 대옥 아씨가 여기 영국부에 눌러 살게
될 거잖아요"

희봉이 눈웃음을 치며 보옥의 표정을 흘끗 훔쳐보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