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는 오줌을 눌 때도 정액이 흘러나오는 유정증세까지 보이고 하다가
마침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가슴은 짓눌린 듯 답답하고 사지는 축 늘어지고 눈앞은 자꾸만 흐려져
불똥같은 것들이 어른거렸다.

밤에는 신열로 온 몸이 펄펄 끓고 침이나 가래를 뱉으면 피가 섞여
나오기도 하였다.

악몽으로 가위눌려 식은땀을 줄줄 흘리다가 비명을 지르며 한밤중에
깨어나는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손자의 병이 위중한 것을 알게 된 가대유는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여
용하다는 의원들은 다 불러왔으나 진단도 맞아떨어지지 못하고 뾰족한
치료법도 없었다.

육계와 부자,별갑,맥문동,옥죽같은 진귀한 약들도 써보았으나 좀체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가용과 가장이 병문안을 한답시고 찾아와 차용증을 들이밀며
빚을 빨리 갚으라고 독촉을 하니 낫던 병도 도로 도질 판이었다.

누가 독삼탕을 써보면 좋다고 하여 가대유가 독삼을 구하러 영국부
왕부인한테까지 찾아가서 하소연을 하였으나 희봉의 농간으로
미삼부스러기만 조금 얻어올 수밖에 없었다.

희봉은 이번 기회에 가서의 못된 버릇이 뿌리째 뽑혀야 한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야박하게 군 것이었다.

그러나 못된 버릇을 고치는 것은 둘째 문제고 당장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으니 가서로서는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가서가 병을 앓은지 일년이 지나 새봄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절름발이 도사 하나가 가대유의 집 대문 앞에서 동냥을
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억울한 일로 홧병이 든 사람,여자를 연모하여 상사병 든 사람,모두
다 고쳐줍니다!"

그 말을 안에서 들은 가서가 귀가 번쩍 뜨여 병석에 누운채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빨리 저 도사를 불러들여 내 병을 고치게 하라구! 아이구 죽겠네.빨리
내 병좀 고쳐달라고 하란 말이야!"

집안 사람들이 할 수 없이 그 도사를 집으로 불러들여 가서를
진맥해보도록 하였다.

도사는 진맥을 하는둥 마는둥 하더니 머리를 저었다.

"이 병은 약으로 고칠 병이 아닙니다. 아주 지독한 상사병입니다.
거북이 뱀에게 친친 휘감긴 형국이지요. 내가 영기가 서린 진귀한
물건을 하나 줄 테니 매일 그걸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바랑에서 이상한 거울을 꺼내어 가서에게 주었다.

양쪽으로 다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인데 그 자루에 "풍월보감"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