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는 살인 혐의가 걸려있는 피고를 봐주면서 원고측도 만족시키는
비책을 미리 준비라도 해놓은 듯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촌은 하루정도 고민하다가 결국 서기의 비책대로 판결을 내리기로
하였다.

우촌은 먼저 문서를 그럴듯하게 꾸며 풍연 살해의 주모자인 설반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금릉지방에서 설반의 사망 확인서가 올라왔다.

그 확인서에는 "폭병신망"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즉,급한 병으로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보증한다는 의미로 설반의 가족들과 지방유지들의
이름이 연명으로 적혀 있었다.

물론 이것은 모두 뒤에서 서기가 설반의 가족들과 짜고 꾸민 일이었다.

그리고 거짓 장례식도 그 지방에서 성대하게 치러졌으므로 원고측
사람들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더나아가 우촌은 관아에 제단까지 차려놓고 서기에게 매수된 무당으로
하여금 원고측 사람들을 비롯한 뭇백성들 앞에서 거짓 점을 치게 하였다.

무당은 신탁이 내렸다면서 양손에 쥔 방울을 흔들며 소리 높여 외쳤다.

"아,신령님이 말씀하신다. 풍연과 설반은 전생에서부터 원수였구나.
전생의 원한을 갚기 위해 두사람이 이승의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구나.

설반이 풍연을 먼저 때려죽이고 풍연의 혼은 또 설반을 급사하게
하였구나.

두사람 사이에 맺혔던 원한은 이렇게 비참하게 결말을 맺었구나.

오, 무서울진저 전생의 원한이여. 이승에서 서로 원수 갚음을 했으니
다음 생에서는 또 어떤 원수갚음이 이루어질까.

이번 살인 사건의 화근은 어디까지나 여자를 이쪽 저쪽에 팔아먹은
뚜쟁이 놈에게 있구나. 그놈에게 혹독한 형벌을 내렸으니 이것으로
모든 재판은 끝났느니라"

무당의 영험까지 동원하여 우촌이 재판을 매듭지으면서,설씨댁은
풍씨댁 사람들에게 손해배상금으로 돈 천량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원래 설씨댁의 돈을 노리고 송사를 했던 원고측 사람들은 재판결과에
별 불만이 없었다.

설시댁은 워낙 재물이 많은 집안이라 돈 천량으로 살인 사건을 무마할수
있으니 천만다행이라 아니할수 없었다.

한편 죽었다고 소문이 난 설반은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변복을
한 채 몰래 장안으로 올라갔다.

설반의 여동생이 바로 설보채였다.

우아한 몸가짐과 고운 살결을 지닌 보채는 그 성품이 오빠인 설반과는
천양지판이었다.

보채의 아버지도 생전에 보채가 설반보다 열배나 낫다고 하면서 몹시
아끼고 사랑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