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하라는 오야마 지사를 체포한 다음 옥문을 열어 사이고를
암살하러 왔던 자객들과 정부의 밀정 혐의를 받아 붙들린 사람들을
모조리 석방했다.

그런데도 사이고 진영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반군들은 도쿄로 가서 그곳을 손아귀에 넣으면 일본 전체를 차지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굳이 가고시마를 지켜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거의 전원이 출정을 하고, 가고시마에 잔류한 군사는 극히
소수였던 것이다.

네척의 군함으로 수병을 싣고 왔으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그들의 하는 수작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체포한 오야마 지사와 석방한 암살대의 대장인 나카하라 경부, 그리고
대원들을 함께 싣고서 야나기하라는 유유히 가고시마를 떠나갔다.

그와 함께 왔던 관료들과 수병들은 남아서 가고시마를 장악하여
통치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가고시마현이 중앙정부의 손아귀에 들어간 셈이었다.

도쿄로 구인되어 간 오야마 지사는 재판을 받고 무참히 처형되었다.

최대의 후원자인 오야마가 사라지고,병력의 보충과 무기 탄약 등
군수물자의 보급지인 가고시마가 정부의 손에 들어가자, 사이고 진영의
타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바루령에서 정부군을 저지하지 못하고 후퇴를 하게 되니
전세가 크게 불리해져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반군은 끈질긴 저항을 계속해 나갔다.

2월에 시작된 내전은 그해 9월까지 7개월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반군은
끝내 구마모토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 이남, 즉 남규슈 일대를 온통 피로
물들이며 싸웠다.

그 동안에 각지에서 사이고의 봉기에 호응하여 불만 사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규모는 크지가 않아 쉬 진압이 되곤 하였다.

사이고 진영이 정부군에게 밀리는 그런 전세였기 때문에 봉기를 획책
하다가 그만두는 고장도 적지 않았다.

이시가와현에서 거병을 꾀하던 시마다 이치로 일당은 정부의 수뇌부
암살 쪽으로 그 방법을 바꾸어 후일에 큰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해 가을, 정확히는 9월 1일 새벽녘에 사이고는 가고시마로 돌아왔다.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여 이곳 저곳으로 쫓겨다니다시피 하다가,
"가고시마로 돌아가서 죽고 싶구나" 하고 마지막까지 투항을 하지 않고
남은 3백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귀향을 한 것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