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1년 3월 23일.

중소기업은행은 하루종일 술렁거렸다.

그날은 이용성신임행장이 취임하던 날.

노조의 "취임저지투쟁"은 상징적 차원을 뛰어 넘었다.

의외로 격렬했다.

한바탕의 몸싸움끝에 이행장은 그날 오후에야 간신히 취임식을 마칠 수
있었다.

이날 노조가 내건 명분은 하나였다.

"낙하산 행장의 취임을 반대한다"는 것.

그리고 지난 25일.1천5백84억원을 모집하는 기업은행주식공모에는 2조원이
넘는 시중자금이 몰려들었다.

민영화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기업은행으로선 신바람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이용성행장덕분"이라는 칭송이 흘러 나왔다.

자본금증자와 주식공모라는 기업은행의 숙원사업을 해결한 장본인이
이행장이었기 때문.

이행장은 취임초기의 반발을 재무부출신이라는 힘과 특유의 추진력으로
잠재웠다.

이번 공모의 바탕이 된 기업은행법개정을 비롯, 연수원확보,세대교체등
쌓였던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했다.

그래서 "어줍지 않은 자행출신보다는 힘있는 외부행장이 훨씬 낫다"는
찬탄을 이끌어 냈다.

국책은행장.

아직까지는 대주주인 정부의 "인사숨통용"쯤으로 치부되고 있는게 사실
이다.

그러나 정통성이 약한 "낙하산 은행장"은 단번에 가시적인 성과를 이뤄내는
강정을 가진다.

이용성행장의 경우처럼 과거 관직에 있었던 인연이 십분 활용되기 때문
이다.

기획원 재무부 건설부등 3개부처 차관을 지낸 이형구산업은행총재도
마찬가지다.

이총재가 산업은행총재로 취임한 것은 지난 90년.

이총재는 그후 4년동안 산업은행의 외형을 2배이상 키웠다.

취임당시 각각 3조4천5백억원과 2조2천억원에 불과하던 설비자금공급규모와
산금채발행실적은 올해 6조9천2백70억원과 6조7천억원으로 증가했다.

산업증권을 자회사로 설립했으며 산은법개정도 이뤄냈다.

내년엔 여의도에 전산센터를 준공, 여의도시대를 개막할 예정이다.

국책은행장들의 업적은 이처럼 화려하다.

그러나 갑작스런 성장의 뒤안길엔 부작용이 산적하기 마련이다.

외부행장의 업적주의로 인해 은행은 멍들고 있다는 지적도 이래서 나온다.

다시 이용성기업은행장시절의 얘기.

91년 어느날 박모지점장은 이행장으로부터 "대출오더"를 받았다.

대출금액은 10억여원.

오더가 나온 배경은 모국회의원이었다.

그러나 박지점장은 행장의 지시를 단호히 거절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6개월이 못돼 부도를 낼 업체여서였다.

"행장은 금방 떠나지만 은행은 영원하다"는게 박지점장의 소신.

결국 박지점장은 신설지점장으로 좌천됐다.

다른 지점에서 대출받은 업체는 2개월만에 부도를 내고 쓰러졌다.

그 돈이 고스란히 부실처리된건 물론이었다.

비단 대출만이 아니다.

은행업무의 모든 권한은 최고경영자에게 집중된다.

최고경영자를 위해서 은행이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될 정도다.

임원들조차 자기 목소리를 내려 하지 않는다.

관료사회보다 더한 권위주의가 은행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같이 국책은행장들이 무리수를 마다하지 않는것은 "더 높은 곳을
향하여"를 모토로 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어떻게 보면 국책은행장으로 내려오는 관료들은 일단 "물먹은" 사람들이다.

관직에 대해 미련이 있을수 밖에 없다.

재기를 노리자면 인사권자나 힘있는 사람에게 잘 보여야만 한다.

자신이 떠난 다음의 은행경영이나 업무의 연속성은 어쩌면 뒷전이다.

실제가 그렇다.

산업은행총재의 경우 80년이후 6명의 총재가 낙하산을 타고 왔다가 재기해
나갔다.

각각 한은총재로 나간 김준성.하영기.최창락총재를 비롯, 정춘택총재
(은행연합회장) 정영의총재(재무부장관) 이동호총재(충북지사-내무부장관)
등이 그랬다.

대한투자신탁사장 주택은행장 수출입은행장을 거쳐 87년 중소기업은행장에
취임한 유돈우씨는 1년도 안돼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각이나 시중은행장선임이라도 있을라치면 국책은행들은 업무가 마비된다.

개각때마다 후보자로 거론된 이형구총재의 산업은행이 그랬다.

외환은행장과 서울신탁행장자리가 비었을때는 재무부출신들이 포진하고
있는 주택은행(박종석행장) 수출입은행(당시 김영빈행장) 신용보증기금
(안공혁이사장)의 업무가 스톱됐다.

이렇듯 국책은행장들은 뚜렷한 장단점을 지닌다.

힘을 앞세워 숙원사업을 해결해 낸다.

반면 관심은 언제나 "잿밥"에만 있다.

"인사를 자율화시켜놔도 은행들의 임원인사에 대한 청탁은 여전하더라.
국민은행만 빼놓고는 말이다"

지난해 박재윤당시 청와대경제수석은 사석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국민은행장만이 자행출신이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