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 쿠쿵! 쿠쿵! 콰쾅! 쾅! 쾅! 쿵!.

수송선을 제외한 다섯첫의 군함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렸다.

물론 공포였다.

비록 폭탄이 날아가 작렬하지는 않지만, 폭발음은 실탄을 때보다 오히려
더 요란했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섬이 온통 쩌렁쩌렁 진동하는 듯한, 굉장한 포성
이었다.

전권대사의 도착을 알리는 신호치고는 엄청나게 위협적인 것이었다.

구로다는 구처럼 처음부터 협박공갈을 하는것과 다르바 없는 자세를
취했다.

포함외교 치고도 극단적인 모습이었다.

일본의 사신이 온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도착하자마자 쏘아대는
대포소리에 강화부의 관원들은 눈이 휘둥그래지지 않을수 없었다.

백성들도 곧바로 전쟁이 시작되는 줄 알고 욕지거리를 뇌까려대며 피란
보따리를 싸기도 했다.

그런 어수선하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강화부관원과 구로다의 수행원이
만나 회담에 관한 협의를 했는데, 일본측의 요구대로 회담장소를 강화
유수부로, 그리고 개최 일자를 11일로 결정했다.

회담 전날인 10일에 구로다는 일행과 함께 4백명의 군사가 호위하는
가운데 강화읍의 들머리인 갑곶진(갑관진)에 상륙했다.

그런데 그날도 예포라고하여 수없이 공포를 쏘아댔다.

예포라기 보다도 공갈포인 셈이었다.

그리고 구로다는 마중나온 접견대관신헌에게 이렇게 말했다.

"4척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는데, 4백명만 호위병으로 상륙 시켰소이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8백명을 거느리고 왔으면서 다섯배를 부풀려 4천명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말로도 대포를 놓는 것이었다.

예정대로 이튿날 유수부 안의 연무당에서 회담은 개최되었다.

조선국측은 접견대관 신헌과 동부관 윤자승이 종사관 홍대중등 4명의 수원
을 대동했고, 일본국측에서는 특명전권변리대신 구로다기요다카와 동부대신
이노우에가오루가 미야모토쇼이치, 모리야마시게루등 4명의 수원을 거느리고
참석했다.

회담은 벽두부터 껄끄러웠다.

구로다가 먼저 조선국측의 대표에 대하여 그 자격을 시비하고 나섰던
것이다.

"접견재관이라니 직함이 모호하오. 나는 일본국의 특명전권변리대신으로
귀국을 찾아왔소. 그런데 귀국에서는 전권을 위임받은 대신이 대표로 나오질
않고, 그저 접견하는 대관이 나오다니 격이 대등하지 않을뿐 아니라,
이래가지고는 앞으로 회담을 이끌어나갈 수가 없소. 귀관에게 전권이
없는데, 어떻게 회담을 진행 시킨단 말이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