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호숫가에 엘리자베스라는 소녀와 라인하르트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잠자는 시간만 빼놓고는 거의 하루 종일 그들은 같이 어울려 놀았다.

학교는 물론 산과 호수와 들판의 어느 곳에서나 늘 같이 있었다.

그렇게 정다운 세월이 일곱해가 지났다.

그리고 소년은 더 공부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났다.

소녀에겐 편지마다 동화를 써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서로 떨어져서 성탄 전야를 맞은 그들은 서로의 정을 담은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소년은 밤새워 긴 편지를 써서 소녀에게 보냈고 소녀는 수놓은 셔츠를
보냈다.

부활절 휴가를 맞아 대학생이 된 소년 라인하르트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엘리자베스도 그땐 이미 성숙한 처녀가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속으로 무척 기뻤으나 왠지 전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알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전과 다른 어떤 벽이 가로막고 있는것 같았다.

작별을 고하기 전 라인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소중한 인생과 둘이서
이루어갈 미래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미처 전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난다.

졸업한 후 만날것을 기약한채..

그러나 몇년후 라인하르트는 엘리자베스가 고향친구인 에리히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래도 라인하르트의 엘리자베스를 향한 사랑은 변할줄 모른다.

몇해가 지나도 라인하르트는 혼자 산다.

그리고 그는 어느날 고향에 돌아와 여자의 집을 방문한다.

귀족인 에리히의 대저택 한쪽에는 어린날 자주 만났던 호수같은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다.

호숫가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용서를 빈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결혼하게 된 경위를 말하면서.

눈물을 삼키며 라인하르트는 말한다.

"우리의 청춘은 어디로 갔을까"라고.

다음날 라인하르트는 혼자 옛날의 호수를 찾아간다.

호수엔 흰 수련이 피어 있었다.

그 수련 꽃잎속에 아름다웠던 그들의 사랑이 숨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튿날 고향을 떠나는 라인하르트의 앞을 엘리자베스가 다가선다.

망연히 바라보는 눈길속에 수많은 사연들을 간직한채 쳐다본다.

그러나 그는 여인에게 가볍게 손을 내밀며 목례를 한채 고향을 떠난다.

걸어가는 길녘에 사랑했던 여자의 얼굴이 새겨진다.

라인하르트는 일생을 혼자 산다.

이제 노인이 된 그는 캄캄한 방에서 촛불도 켜지않고 의자에 앉아 젊은날의
추억에 하염없이 젖는다.

허공을 보고 있노라면 푸르게 출렁이는 호수가 떠오르고 호수는 파문을
일으키며 엘리자베스의 얼굴처럼 부서진다.

노인의 눈이 미칠수 없을 만큼 멀리 깊게 호수에 오버랩된다.

청춘! 얼마나 빛나고 아름답고 맑은 어휘인가.

정녕 청춘은 섬광인가.

그토록 찬란하고 그렇게 빨리 지나가 버린다.

청춘의 기간은 짧다.

그러나 청춘의 추억은 영원하다.

세상을 다 산 노인이 되어 캄캄한 어둠에 서 있을 때 환등의 벽에 나타나는
청춘의 추억들.

그것은 다시 올수 없는,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수 없는 세월이라도, 그리고 다시는 만날수 없는 얼굴
이라도 그것은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의 그림이다.

생애에서 영원히 기억될 그림.

슬픔이라도 청춘은 하늘보다 푸른 빛, 고독이라도 호수보다 더 맑은
빛이다.

청춘의 열정은 태양빛 원색, 청춘의 절망은 흑요석처럼 투명하게 빛날
것이다.

그런 청춘의 빛깔과 모습을 나는 화면에 다시 떠올려 보고 싶은지 모른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