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의 건국,태종의 계위,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즉위등이 잇달았던
조선초기의 왕권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국가에 중대사가 일어날때마다 공신들이 쏟아져 나왔고 기반이 확고해진
이들 후구대신들이 국사를 좌지우지 했다.

이같은 현상은 성종때 극에 달한다.

그는 비대해져만 가는 훈구대신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젊은 선비들을
언론문필을 담당하는 3사에 기용하는 개혁정책을 쓰기시작했다.

"전조에서 연륜과 격식에 구애되어 뛰어난 사람이 있을지라도 하찮은
사람과 섞였으니 어찌 국가에서 인재를 쓰는 도라고 하겠는가.

앞으로 그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자는 자격에 구애되지 말고 차례를
뛰어넘어서 쓰고 범용한 무리는 벼슬을 올리지 말도록 하여 어질고
어리석은 이가 함께 오래 머물러 있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1484년11월
성종은 관리를 전형하던 이조에 이런 어명을 내려 인사제도개혁의 근거를
마련했다.

그리고 보라는듯 평소에 잘아는 사이로 한직에 있던 최호원을 당상관인
병조참지(정3품)에 기용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그러나이 인사의 결과는 주었던 관직을 다시 거두는 수모를 감수한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최호원은 문과출신이기는 했지만 풍수지리에 능한 술사였고 대구부사를
지낼때는 자기땅에 물길을 대기위해 백성의 땅을 침범했다는 탄핵을
받은 인물이었다는 것이 홍문관의 상소로 드러나 반대여론에 부딛쳤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치는 성품의 성종이었지만
사림을 중앙정치무대에 진출시키는 인사정책은 굽히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그는 재위26년동안 괄목할만한 업적을 쌓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인사정책은 후에 성구.을사사화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았고 사림들이 나위어져 싸우는 경쟁을 초래하고 말았다.

"공무원사회를 침체와 안일이 지배하고 있으므로 연고에 구애받지
말고 창의적으로 성실히 일하는 공무원을 발탁,승진시켜 보상하는
인사제도를 운영하라"는 김영삼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총무처가
발탁인사 제도마련에 착수했다고 한다.

이미 500여년전에도 똑같이 강조됐던 발탁인사가 다시 등장한 셈이다.

지금도 발탁인사가 전혀 없는것이 아니고 공무원사회를 침체와 안일에
젖게 만드는 까닭이 꼭 그것 때문만이라고는 생가되지 않는다.

일이 벌어지면 그 책임은 하위공무원만이 져야하는 요즘의 비정상적인
풍조가 더 큰 문제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