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미국의 희극배우인 찰리 채플린은 "살인광시대"라는 영화를 만들어
세상에 선보였다.

30년동안이나 성실하게 근무한 은행에서 해고된 주인공은 돈 많은 중년
여자들과 결혼을 하여 그 여자들을 차례로 죽인뒤 보험금을 타먹은 극악
무도한 사업을 시작했으나 끝내는 그 범행이 발각되어 교수대로 간다는 것이
그 줄거리다.

채풀린은 이 영화에서 자본주의 사회제도의 비인간적인 물신주의풍조를
신랄하게 고발했다.

그렇다고 살인행위 자체를 합리화시켜준 것은 아니었다.

역사를 거슬러 엽기적인 살인사건들을 살펴 보노라면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다.

전쟁으로 빚어진 대량살인에 못지 않으니 말이다.

미국의 한 재판정에서는 인디언암살단원들이 1790~1840년 사이에 931명을
노랗고 흰천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엄청나게 많은 200만명이 희생당했다는 추정도 있다.

더욱 깜짝 놀랄 일은 헝거리의 백작부인이었던 에르즈벳 베토리(1560~
1614)의 살인범죄다.

1611년에 시작된 재환에서 한 증인은 그녀가 직접쓴 610명의 살해자명단을
보았다고 중언했다.

그 희생자들은 그녀의 거처였던 세레성 근처에 사는 처녀들이었던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와서는 콜롬비아의 악한 독재자였던 데오필로 로자스가
27세였던 1948년부터 그가 죽은 1963년까지 592명의 목숨을 앗았다.

한국의 경우에도 1982년 경남 창령의 경찰관총기난사 사건으로 57명이
목숨을 잃은 것을 비롯 크고 적은 악랄한 살인사건이 수없이 이어져 왔다.

그런데 문제는 살인의 수법이 날이 갈수록 극악해지고 지능화되어 가는데다
그 목적이 비인간화되어 가는데 있다.

이번에는 가진 자들을 징벌할 목적으로 결성된 극악한 살인법죄집단이
준동해 왔는데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

그것도 지하에 살인감옥과 화장터까지 갖춘 인가를 버젓이 만들어 놓고
범행을 저질렀다니 경악할수 밖에 없다.

한국범죄사상 유례없는 행각을 벌여 놓고도 조금도 뉘우침이 없는 범인들의
파렴치한 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것인가, 정신병리학자나 심리학자,
범죄학자들이 흔히 말하듯이 어릴적의 불우한 가정환경탓일까.

그렇다면 이와 한국사회는 이런 유의범죄자들이 날뛰는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한국사회 전반에 완연되어 있는 일신주의에 있다.

가진 자거나 덜 가진 자거나 모두가 보다 갖기 위해서는 비리와 범행을
서슴치 않는 사회병리현상이다.

이번 사건을 이런 사회병리현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치유할수 있는 처방을
찾는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