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납품업자를 거쳐 백미상조합 상임감사일을 하던 그 무렵,그러니까
1938년부터 나와 아버님은 이내 새로운 사업에 대한 계획에 착수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사업에 관한 한 나보다도 훨씬 세상 경험이 많으셨던
아버님의 혜안이 탁월했다. 그동안 나는 여러가지 사업으로 규모있는
제조업체를 만드려는 자금확보는 해놨지만, 업종선택은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터였다.

그러던중 아버님의 일본 구주지방으로의 출장은 우리 부자가 자기업을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버님께선 해마다 구주지방에 가시면 그곳 "아리타"의 애자 납품업자들
로부터 그곳에서 생산된 자기제품을 선물받곤 했는데,당신께선 오동나무로
잘 포장된 자기들을 애지중지 아끼셨다.

그리고 항상 "원래 일본도자기의 원조는 우리 조상들인데." 하며
되뇌이시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일반가정에서 쓰는 사기그릇들은 모두 일본에서 생산돼
수입된 것이다.

게다가 일제는 전쟁준비를 위해 일반 가정에서 식기로 사용하던 놋그릇
들을 모두 강제 공출해갔던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수입 자기그릇은
부르는게 값이었다. 아버님께선 그점에 착안하신 것이다.

자기공장을 차리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목포는 인근에 자기의 원료인
점토가 많이 있고,그것들을 배편으로 운반하기에 용이한 점이 있었다.

필요한 것은 자기를 만드는 기계들과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기제조기술을
배워오는 것이다.

아버님의 준비작업은 치밀하게 진행됐다. 일단 자기공장을 세우기로
마음먹으신 아버님께서는 일제의 사업승인과 관계없이 부지런히 구주를
드나드시며 자기제조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오셨다.

그 기간 나도 여러차례 일본을 오가며 자기제조에 필요한 기자재들을
하나씩 하나씩 구입해 배편으로 운반해왔다.

아버님께선 기술을 배워올 사람으로 나를 지목하셨다. 아무래도 새로
사업을 시작하려면 경영주가 제조기술 과정 전반에 대해 환히 꿰뚫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가 일본에 가서 직접 기술을 배워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말을 듣고 나는 백미상조합의 일을 그만두고는 곧장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미 아버님께서는 구주를 내왕하시며 그곳 자기시험소의 소장과 협조
관계를 맺고 계셨는데 내가 자기제조기술을 배우러 간 곳이 그곳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구주의 아리타는 가히 일본자기의 본산지였다.
구주지방 전지역에 자기공장이 수천개가 있었고 그런 때문에 구주에서는
자기와 관련되는 일을 하지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원조가 임진왜란때 납치되어간 조선인 이삼평 도조, 아직도 이삼평
도조의 14대손이 아리타에서 자기를 만들고 있는데 아리타의 신사에선
그때 이미 이삼평 도조를 신주로 모시고 있었다.

그가 인질로 잡혀가 처음으로 아리타에 자기제조술을 전한 사람인
때문이었다.

아리타 사람들이 이삼평 도조를 자기네 신사의 신주로 모신 까닭은
아리타에서 자기로 밥을 먹지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산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리타에 처음 갔을때 이미 그곳에선 공장마다 자기일을 하는
사람들로 들끓었고 온 시가지가 가마 굴뚝연기로 가득찰 정도였다.

그런 자기제조기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그들은 자기시험소를
만들었고 내가 그곳에 연수생(학생)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난 몇천년전부터 만들어왔던 우리나라의 자기제조기술을
배우기 위해 역으로 우리가 기술을 전해줬던 일본으로 가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