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병이 되자 일본천황은 소위 은사금이라는 것을 내렸다.

영향력있는 조선의 늙은 선비들을 무마시키려는 얄팍한 회유책이었다.

양평 금의에 살던 전통유학자 금계 이근원(1840~1918)에게도 은사금을
수령해 가라는 연락이 수십번씩이나 왔지만 그는 "의리에 마땅치 않으면
한개의 물건이라도 받을수 없다"면서 거부해 버렸다.

일본 헌병이 찾아와 이미 은사금을 받은 명사들의 명단을 적은 "기노첩"을
보여주자 그는 "눈이 어두워서 안보인다"고 고개를 돌렸다.

"조선이 일본과 합병이 되었는데 여기만 일본땅이 아니냐"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그를 국사범으로 다루겠다고 위협했을 때도 그는 분명하게 대답
했다.

"천하가 모두 일본이라 하더라도 나홀로 조선이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거천하개왈일본 아독지조선야)

금계는 이 일로 지평헌병분견소에 끌려가 헌병들에게 맞고 의관이 찢기어
형편없는 몰골로 7일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서도 끝내 은사금을 받지
않겠다고 버텼다.

또 고문을 당하면 잘못 대답할 것을 염려해 아예 "안받겠다"는 대답을 글로
적어 놓아 버렸다.

금계는 화서 이항노의 문인으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유인석과 동문이다.

그러나 그는 의병활동은 한 적일 없다.

만주로 건너가 산 일도 없다.

언젠가는 나라의 국권이 회복될 것이라는 확신아래 제자들에게 우리의
사상과 전통을 가르치며 고집스레 고향을 지킨 정신적 항일의 표본이었다.

조상대대로 이어져 온 한 민족의 문화가 이민족의 침략으로 타문화와
동화되어 갈때 그 민족의 문화를 지켜갈수 있도록 한 것은 무력항쟁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인 항쟁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일제35년은 이런 역사적 교훈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주고 있는 예라고
할수 있다.

정부는 광복50주년을 맞는 내년에 약2만명의 독립유공자를 찾아내 사상
최대규모의 포상을 하기로 하고 이미 4만여명의 공적을 심사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기회가 그동안 해외독립운동및 의병.광복군등 무력항쟁에 치우쳐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국내의 전통유학자를 비롯한 지성인들의 항일운동이
올바르게 평가받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그러나 50년동안 포상한 독립유공자가 6,489명(15일현재)에 지나지 않는데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2만명을 어떻게 제대로 심사를 한뒤 포상하겠다는
것인지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