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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전략군단사] (203) 오원철 <기아경제연구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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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조선업계는 73년 신조선 수주량이 전해에 비해 2.5배나 늘어나는
    전무후무한 대호황국면을 맞았다. 세계적인 호경기 속에서 앞으로도
    해상물동량이 계속 늘 것이라는 것이 선주들의 생각이었다. 선주들은
    신조선, 그 중에서도 특히 유조선을 앞다퉈 발주함으로써 현대는 선진
    조선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선가를 무기삼아 12척의 VLCC를 수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는 조선 수주영업을 시작한 첫해인 72년에 51만8천t을 수주,세계
    시장의 1.75%를 차지했으며 73년에는 1백94만7천t을 따내,시장 점유율을
    2.64%로 높였다. 오일쇼크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신조선 수주량이 격감한
    74년에도 26만t급 VLCC 2척과 소형 다목적화물선등 87만t을 수주함으로써
    시장점유율을 3.0%로 높일수 있었다.

    이중에는 일본에서 발주받은 것이 전체수주량의 절반인 6척이나 된다.
    일본에서까지 발주를 받으니 정주영회장으로서는 세계조선업계의 전망에
    대해 희망을 갖고 조선소를 확충했을 것으로 추측할수 있다.

    또한 현대조선소의 확장은 대량생산이 결국 최대의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됐다고 볼수있다. 현대조선의 확장은 73년이후 부터
    본격화 됐다.

    새로 건조한 제3도크의 폭은 92m로 큰배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조선소
    공장건물도 3만~4만평에서 8만8천여평으로,강재처리능력은 20만t에서 50만t
    으로 각각 확장했다.

    단순히 시설을 늘렸다기 보다 조선소 하나를 더 건설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시설규모를 엄청나게 확충하고 현대화했다. 73년에는 중화학공업
    선언을 한 해이다. 정부는 중화학공업 6개 업종에 조선공업을 포함시킴
    으로써 조선공업 진출에 관심갖는 업체들이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한조선공사의 남궁련사장,삼성의 이병철회장의 열의가 대단했다.
    삼성의 경우 경남 안정리를 조선소 입지로 정하고 토지매입까지 했다.
    현대와 삼성이 조선분야에서 한바탕 싸움이 붙을 판이었다. 이때 현대는
    선두주자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증설에 증설을 거듭해 나갔다. 국내의
    조선능력은 커져만 갔다.

    그과정에서 대형조선소는 현대조선말고도 하나쯤 더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고 제2의 대형조선소 건설이후에는 상당기간 계획이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났다.

    우여곡절끝에 제2 조선소의 실수요자로 기존업체인 대한조선공사가 지정
    (옥포조선소)돼 삼성은 조선공업에서 손을 뗄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삼성은 조선공업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않고 후에 고려원양이 시작한 6만t급
    조선소를 77년4월 인수받아 운영하게 된다.

    현대조선(주)은 국내 조선공업의 선두주자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앞날이 무지개빛으로 보장돼 있었던것은 아니다. 증설공사가 한창일때인
    73년 10월부터 시작한 제1차 석유파동으로 위기를 맞게됐다.

    세계경제의 급속한 침체는 국가간 교역물량을 격감시켜 세계 해운업계에
    일대 불황을 몰고왔고 그 여파는 곧바로 조선업계에 밀어닥쳤다. 세계
    조선업계는 그중에서도 74년에 들어서면서 선복량 과잉이라는 난관에
    부딪쳤다. 특히 73년말 현재 세계 전체선복량의 40%(유엔통계연감)를
    차지하던 탱커선의 과잉이 두드러졌다.

    그 이유는 오일쇼크후 전세계의 에너지 수입국들이 유류소비를 적극
    억제,그물동량이 격감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오일쇼크가 있기 직전
    유류에너지 소비급증을 예상,전세계 선주들이 투기적으로 유조선 제작에
    몰두했던 만큼 탱커선부문에서의 선복과잉은 한층 심각했다. 당시 세계
    유조선업계는 70년대 초반 신조선을 과잉발주한 결과 앞으로 4년간 4백척의
    초대형유조선이 더 생겨날 형편이었다.

    거기다 75년 6월5일을 기해 수에즈운하 통행이 재개됐다. 수에즈운하는
    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점거한 이래 폐쇄
    됐었는데 73년 제4차 전쟁에서 아랍국가들이 석유를 무기화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세계여론에 떼밀려 74년 시나이반도에서 철군해야 했다.
    철군협정은 74년 1월18일 체결돼 이때부터 아랍국은 수에즈운하 재개를
    위한 보수공사를 했었다.

    수에즈운하의 재개통은 페르시아만에서 유럽까지의 왕복 운항시간을
    25일이나 단축시켜 오일쇼크후 줄어든 세계 물동량을 더욱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당시 8만 급 이상의 선박은 수에즈운하를 통과할수 없어
    20만 급 이상의 VLCC는 중동~유럽노선에서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

    중동으로 몰려든 오일달러도 탱커선 수요를 위축시켰다. 오일달러 유입
    으로 경제건설의 기틀을 다진 중동 산유국은 단순히 원유를 수출하는 차원
    에서 벗어나 자국내에 정유공장을 건설,정제품 수출을 겨냥했다.

    정제품은 중소형 제품탱커(Product Carrie)만 수송하게 되므로 초대형
    유조선은 쓸모가 없었다. 그 결과 VLCC제작에 주력해온 세계 조선업계는
    치명적인 불황에 직면하게 됐다. VLCC건조에 총력을 기울였던 현대조선도
    오일쇼크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됐다.

    뒤늦게 조선업에 뛰어든 신흥조선소라 VLCC건조 경험외에는 별다른 기술
    축적이 없어 현대조선이 느낀 위기감은 더욱 절박했다.

    오일쇼크 이후에는 74년3월 일본의 재팬라인사에서 2척의 VLCC를 수주한
    것을 마지막으로 단 1척의 VLCC도 주문받을수 없었다. VLCC 수주가 재개된
    것은 그로부터 12년 뒤인 86년의 일이다.

    74년11월 쿠웨이트 해운에서 소형 다목적화물선을 수주한것이 고작이다.
    이러다가 회사문을 닫는게 아니냐는 불안이 만연했다.

    현대의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새로운 주문을 받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미 선주들이 발주한 배까지 취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현대가
    이미 수주한 12척의 VLCC가운데 3척이 계약 취소 또는 인수 거부됐다.

    그리스의 선주 리바노스씨에게서 수주한 26만t급 7302호,홍콩의 CY퉁
    (Island Navigation사)으로부터 수주한 26만t급 7308호와 7310호가 문제의
    배들이었다.

    우선 7302호의 경우는 74년6월 진수식과 명명식까지 가졌던 만큼 오일
    쇼크와는 무관하며 인도예정일인 74년11월에 사실상 건조 완료됐다.
    그런데 선주 리바노스씨는 오일쇼크가 발발하자 이 배를 인수하지 않기로
    방침을 굳혔다.

    오일쇼크의 여파로 사용하려는 임대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리바노스씨는
    제품상태를 문제삼아 완공기일을 지연하려고 했다. 계약상 인도일이 지켜
    지지 못하면 계약이 취소되고 지불했던 선수금은 이자까지 붙여서 변제하게
    돼있는 계약조문을 악용키 위해 의도적 지연정책을 세웠다.

    그 지연은 잘못을 구실로 지적하고 시정이 되지 않으면 또 다음 정규
    검사를 보이콧하는등 악질적 수법을 썼던 것이다.

    새 지적이 있을 때마다 현대는 밤을 새워 돌관작업을 해 요구를 충족해
    주었다. 이제 더이상 건조 지연 구실이 없다고 판단될 때쯤 또 하나의
    지적을 해왔다. 제 날짜에 맞추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였다. 정주영
    회장은 이것이 마지막 요구인가를 확인한뒤 작업을 강행,제 날짜에 작업을
    마쳤다.

    리바노스씨는 "인도일자가 하루 초과됐다"는 이유를 들어 인수를 거부
    했다. 현대와 자신의 기산일수는 그 기준이 하루 다르다는 주장이었다.
    리바노스씨의 속셈은 분명해졌다. 용선계약의 길이 막히자 어떻게 해서든
    선박을 인수하지 않고 원리금도 받아내자는 것이었다.

    현대는 국제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백보를 양보해서 그의 주장이 옳다
    하더라도 "단 하루의 오차"로 26만t급 대형선박 인수를 거부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트집에 불과했다. 현대가 이처럼 국제소송까지 제기한 것은
    다른 선주들이 리바노스씨와 유사한 작태를 보이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
    두려는 의지도 포함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주 해약은 계속됐다.

    7308호,7310호를 발주한 홍콩의 CY퉁이 리바노스씨의 인도 거부직후
    일방적으로 계약 해제를 통고해왔다. CY퉁은 리바노스씨와는 달리 깨끗이
    계약금을 포기한 뒤 선주 감독관을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이후부터 선박수주도 끊겨 현대는 심각한 경영위기를 맞게됐다. 자금순환에
    막대한 어려움이 생겨났다. 그러나 정회장은 특유의 돌파력으로 난관을
    뚫고 나갔다. CY퉁이 해약한 7308호 7310호의 건조강행을 지시한 것이다.
    선주가 해약했다고 해서 작업을 중단했다가는 지금까지 배를 짓는데 들어간
    자금이 고스란히 손실로 처리된다.

    그러나 계속해 배를 지어 완공선을 만들어내면 상황은 달라진다. 비록
    당장은 자금난을 겪을 것이지만 언젠가는 이 배가 팔리거나 다른 목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이윤을 남겨줄 것이 틀림없다는 판단이었다.

    더욱이 오일쇼크후 원자재가격이 폭등하고 있는 만큼 현재의 저렴한 비용
    으로 배를 만들어두면 반드시 큰 이윤을 보리라는 것이 정회장의 판단이
    었다.

    정회장의 이같은 결단 이면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건조작업을 중단할
    경우에는 당장 조선소 가동률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되면 인원
    감원조치가 불가피해진다. 당시 상황으로는 감원이란 있을수 없을 때이다.
    감원하겠다고 박대통령에게 보고할수도 없는 상황인 것이다.

    정회장은 경영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7308호 7310호의 건조강행을
    지시,잇단 인도거부 및 계약해제로 술렁이던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유지비
    계속 들어 결국 7302호 7308호 7310호 3척의 대형유조선은 완성이 된채
    쓸곳이 없었다. 배를 사줄 사람도 없고 배를 용선해서 써줄 사람도 없어
    이 거대한 배 3척을 현대조선 앞바다에 마냥 묶어놓고 있었다. 그래도
    경비는 계속 들어갔다. 배가 항해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배의 모든 기관및
    각종장치를 완전히 꺼버릴수는 없었다.

    나(필자)는 이 소식을 듣고 현대를 도와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조선
    공업의 발전을 위해 단하나밖에 없는 대형조선소를 살려놓고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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