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경제연구원과 한국과학기술정보센타의 통합작업은 서석준상공부
장관의 진두지회로 한국산업경제기술연구원(KIET)법이 국회통과됨에
따라 본격화 되었다.

당시 전두한대통령은 KIET를 국제 외교 정치에 관한 국내외정보를
수집분석하는 안기부와 같이 국내외 경제 산업및 기술에 관한 정보를
수집 분석해 정부에 산업정책을 건의하고 기업에게는 "정보은행"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한다는 구상이었다.

통합작업이 마무리되자 82년 1월11일 전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KIET개원식을 갖고 나는 초대원장으로 취임했다.
KIET의 첫번째과제는 서장관이 요청한 석유화학산업의 조업부진문제와
방위산업 부실화에 대한 대책연구였다.

당초 3월말까지로 잡힌 연구시한을 2월말까지로 당겨 달라는 것이었다.
그이유는 석유화학업계가 운명으로 "현재 30%의 조업율로는 더이상
가동을 계속할수 없어 3월에는 불을 끄겠다"는 취지의 진정서를 청와대에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그간 국제경제연구원과 정보센타에서는 산업을 연구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 내가 팀장노릇을 하면서 밤늦게까지 석유화학업계와
방위산업체들로부터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시켰다.

2월말께 나는 서장관을 오시게해서 내가만든 연구보고회의를 열었다.
"석유화학의 조업율이 떨어진것은 상공부가 섬유수출기업의 요청을
받아들여 국내값보다 7%가 싼 유화제품의 수입을 자유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또 일본이 오일쇼크이후 재고가 쌓이고 있어 값을 10%인하
수출함에 따라 한국의 석유화학공장은 제품을 팔수없게 된것이다"
대책회의에서 나는 한국의 유화업계가 생산을 중지했을 경우의 피해들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첫째, 유화제품수입 비용으로 년 4억5천만달러의 외화낭비가 발생하고
이때문에 국제수지적자가 그만큼 확대될 것이다.
둘째,유화공장 건설때 빚진 외채부담 약5억달러를 갚을 길이 없게되고
설비는 대부분 고철화 될것이다. 셋째 그렇게 되면 국내유화시장은 일본
유화업계에 독점될 것이고 넷째 우리나라 석유화학기술이 후퇴할 것이다.

따라서 대책으로 유화수입개방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고 과거처럼 수출용
원자재도 국산석유화학제품을 사용토록 해야한다고 역설했다.
방위산업의 경우 그간 생산은 계속되었으나 국방부 주문량이 재고과다로
감소하고 있었다. 반면 설비투자를 위한 과다부채로 금리부담이 커 부채
누적이 이어지면서 이제는 더이상 차입으로 금리를 지불할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 이에대한 대책으로는 회사별 재무구조 분석결과에 따라 3~5년간
이자지불을 유예하고 방산설비로 민수용제품을 생산토록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장관은 장장 3시간의 진지한 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석유화학 정책
변겨은 내가 할수있으나 방산업계의 이자지불 중지조치는 경제기획원
소관이므로 박소장이 금준성부총리에게 정책건의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나는 김부청리에게도 이같은 자료를 전부 제시하고 이 길이외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김부총리가 "박소장 수고많았어요.
나도 걱정을 해왔는데 이제는 이 자료를 근거로 정책을 추진할수 있게
되었으니 내게 맡기시요"해서 나는 일한 보람을 느꼈다.

그후 산업은행 최창호총재를 만났더니 "박소장은 방위산업은 왜 몽땅
나한테만 뒤집어 씌우느냐"고 해 한바탕 웃었다.

며칠후에 섬유수출조합 이사장이 나에게 전화로 이렇게 하시면 섬유
수출이 얼마나 타격을 받는지 아십니까"하길래 "봉제품 수출을 위해
원단수입도 개방토록 건의할까요"했더니 "아니구 혹떼려다 혹붙이게요"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해 9월에는 유화공업협회장이 점심을 사며 "석유화학공장들의
가동률이 80%로 올라갔다. 고맙다"라는 인사를 해 흐뭇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