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처리에는 원칙이 있게 마련이다. 형식이 있고 경중이 가려져야
한다. 앞뒤 안보고 강력하게 밀어부치기만 하면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기준에 따라 공식처럼 움직여야 되는 일도 있다.

장영자씨 어음사기 사건의 후속조치 결과를 보면 정부가 무엇엔가
쫓기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저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는 느낌 뿐이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돼서 어떤
처벌을 내려야한다는 원칙이나 룰은 보이질 않는다. 오로지 강력히
대응해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 뿐이다. 한마디로 감정적이라는 얘기다.

금융당국이 은행장까지 문책한 배경은 간단하다. 개혁중의 개혁이라는
금융실명제가 일선 현장에서 웃움거리가 됐다는 비난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일벌백계로 본때를 보여 주자는 게다. 언감생심 다시는 실명제를
어길 엄두를 내지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쉽게말해 "겁"을 주자는 것이다. 대체로 이렇게 혼쭐을 내면 분위기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치안이나 마약사범같은 경우에 특히 약효가 빨리
나타난다.

한데 경제의 혈관이라고 불리우는 금융은 생리가 다르다. 마치
생물체와 같아 민감하기 짝이없다. 잘못 건드리면 터지거나 얼어붙고
마는 체질이다. 그래서 금융은 "형"으로가 아니라 "제도"로 다스리는
게 원론이다.

그러나 이번 후속조치에선 제도나 원칙 따위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세상이 시끄러우니까 가급적 "높은" 사람을 "많이" 자르는 데만 혈안이
됐을 뿐이다.

이번에 문책을 당한 임원중에는 직접적으로 해당업무와 관련이 없는
사람도끼어 있다. 그런가하면 이들에게 적용한 법적근거도 어정쩡하다.
긴급명령에는 실명제를 위반할 경우 5백만원이하의 과태료만 물릴수
있게 돼있다. 한데 실명제를 위반했다며 기관장을 해임했다. 일반적인
불법행위에 해임까지 가능하도록 해놓은 한국은행법을 적용한 결과다.

더군다나 긴급명령엔 금융기관 직원이 아닌 일반인은 금융실명제를
어겨도 처벌할 근거가 없다. 검찰이 반실명사범을 적발하고나서도
애를 먹는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어쨌든 사회를 혼란케 했으니 할말은 없겠지만 이렇게 구멍난 제도를
놓고도"제도는 완벽하며 관행이 문제"라는 당국의 태도에도 할말을 잃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