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안지를 잘 써내면 뭐합니까. 채점자가 점수를 주지않으면 그만인데".
한 시중은행 고참부장의 말이다. 아무리 업적이 두드러지고 평판이
좋아도 인사권자의 "노우"한마디면 그만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낙하산 인사"나 "줄인사"로 대표되는 과거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다른 어느때보다도 합리적인 인사에 대한
요구가 높다. 이런 요구도 인사권자가 달라져야 수용될수 있다. 은행장의
사고가 먼저 변해야한다.

지난해 2월 보람은행주총에서 새로 임원으로 선임된 K상무는 한달여동안
출근하지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지방출장중". 그러나 출근하지 않았
던게 아니라 출근하지 못했다는것이 더 정확한 설명이다. 낙하산인사라고
주장하는 노조의 반발이 거셌던 탓이다. "이제 1년이 갓지난 은행에서 외부
인사 영입이 웬말인가"라는 노조의 주장은 조합원뿐만아니라 부장급에까지
상당한 공감을 얻었다. "(당시 이병선)은행장이 너무 앞서간다"는 뒷말과
함께.

이런 낙하산인사는 그야말로 아주 단편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은행장급
들이 대거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상황이다보니 임원이야 말할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는 상급기관의 위력을 감안하면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이해가 갈
수도있다.

문제는 은행내부에서 발생하는 불가측성의 인사에 있다. 10여년전 한
시중은행의 임원선임은 그해 주총의 "하일라이트"로 꼽힐만 했다. 본점부장
도 아니고 서울의 대형점포장도 아닌 경기도라는 변방의 점포장이 전격 임원
으로 발탁된 것. 물론 그 사람의 능력이 너무나도 출중했던 탓이기도하다.
그러나 발탁인사치고는 너무나 "획기적"이었던것도 부인할수없다. 은행임원
선임이 얼마나 임의적인지를 쉽게 짐작할수 있는 사례이다.

해마다 은행주총이 열리면 "역전" "반전" "의외"라는 단어가 신문머리를
장식한다. 의외의 인사가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지난해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H은행의 경우 입행이 한참 늦은 부장이 고참부장을 제치고 임원
으로 발탁됐다. 인사권자가 이 사람을 임원으로 발탁한데는 나름대로의
객관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었다고한다. 그러나 상당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화제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인사권자인 은행장이 인사원칙이 없는것처럼 비춰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은행장 자신이 외부의 영향력으로 되다보니 임원선임에까지
외부의 입김을 거스를수 없다. 또 뿌리깊은 지역감정과 파벌싸움도 무시할
수없다.

지난92년4월초 이상경당시대국은행장이 돌연 사임했다. 사임이유는 명확
하지 않았지만 주변에선 "TK목장의 결투"의 결과라고 떠들었다. 이행장은
그해 2월주총에서 임기만료된 강경헌당시전무를 퇴임시키고 서덕규당시상무
를 전무로 승진시켰다. 이행장과 서상무는 경북고 서울대상대출신이고 강
전무는 대구상고 경북대출신. 이런 묘한 관계가 대구지역에서 경북고와
대구상고출신간의 파벌싸움을 야기했고 급기야는 이행장의 사임까지로 이어
졌다는게 정설이다.

이렇듯 파벌과 인연 외부의 압력때문에 은행임원인사는 불가측적이었고
관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전의 드라마를 보는 재미를 안겨주기도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론 암투와 상호비방이 난무하고 명령계통이 무너지는
상황도 발생하는등 심한 부작용을 야기하고있다. 이같은 조짐은 올해도
계속되고있어 올 주총도 "명쾌하지 못했던"과거식될것이라는 우려가 팽배
하다.

이런점에서 지난해 제일은행이 단행한 인사는 눈여겨 볼만하다. 제일은행
은 지난해5월 복수전무제를 부활하면서 신광식상무를 전격 전무로 발탁했다.
신전무는 서홍배 이주찬상무보다 입행이 늦은 주니어상무출신. 두명의 전무
가 치열한 후계자싸움때문에 은행업무가 제대로 되지않았던 과거의 단점을
극복하자는 의도라는것이 제일은행의 설명이다. 아울러 능력위주 인사관행
를 굳히고 후계구도를 가시화하자는것도 한 이유로 꼽히고있다.

이제 상황은 변했다.

그동안의 파행인사는 여건미비라는 이유로 합리화될수도 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다르다. 자율인사여건이 정착되고있는 시점이다. 자율인사의
정착은 은행장의 판단에따라 성공여부가 판가름날 수밖에 없다. 자신과의
인연이라든가, 아니면 퇴진후의 자신의 영향력을 염두에 둔다든가,아니면
외부의 눈치를 알아서 살핀다든가해서 자율인사의 취지를 퇴색시킨다면 은행
업전체의 발전을 가로막은 사람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물론 임원선임의
기준은 자신이 데리고 일할 사람인 만큼 전적으로 은행장 자신에게 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적어도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얻어야한다. 자율인사의
성패여부는 결국 은행장에 달려있다.

그러기위해선 은행장이 먼저 깨끗해지고 사심을 없애는것이 중요하다.

<하영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