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ECOKC총회는 이틀간 계속 되었다.

회의가 끝난 다음날 신문기자를 포함한 우리대표단 전원이 제네바에서
가장 좋은 중국음식점에 모였다.

나도 그자리에서 점심을 먹고있었는데 김학열부총리가 "박성상소장"하고
큰소리로 불렀다. 나는 깜짝놀라 "예"하고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김부총리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김부총리를 향했다. "박소장이
준비해 준 월터박의 연구보고서는 아주 좋았어. 그 친구 논문에 의하면
일본도 50년대부터 60년대초까지 국제수지적자가 늘기만 했더군"나는
"예,그랬습니다"했다. "다른나라는 총회에서 국제수지문제와 외채문제는
끄집어 내지도 않았는데 일본대표가 그 문제를 들고나왔단 말이야. 그래서
박소장이 밑줄 그어놓은 일본의 적자시대 설명을 읽어주고 "일본도
경제발전 초기에는 국제수지적자 행진을 계속했고 대외부채도 늘었다는데
한국도 이제 경제발전을 중단할 생각이라면 몰라도 현재와 같이 10%수준의
고도성장을 지속하는한 빚지는것은 불가피하지 않겠습니까"했지. 하지만
연40%의 수출증가세가 계속되면 일본과 같이 몇년후에는 대외부채 증가세도
둔화될 것이라고 했더니 일본대표가 아무소리도 못하더군. 박소장,나는
지금까지 한국은행 해외사무소는 외화를 낭비하는 불필요한 존재라고
말해왔는데 이시점부터 한국은행 해외사무소는 필요불가결한 것이라고 내가
귀국하면 선전해 주겠네" 나는 벌떡 일어서서 "감사합니다"하고 절을 했고
좌중은 웃음과 박수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제네바에서 김부총리일행을 전송하고 나는 신문사 런던특파원들과
런던행비행기에 동승했다. 그중 한분이 김부총리가 제네바 레만호에서 또
한토막의 일화를 남기셨다고 했다.

"그게 무슨소리요"하고 물었더니 "김부총리께서는 재무부 수행원들을
자기방으로 불러놓고 "한국은행 박소장은 이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구해
나에게 가지고 왔는데 재무부간부들은 이일이 자기들 일인데도 내가 꼭
필요한 월터박 연구논문도 구하지 않는 바보들이니 모두 저 레만호수에
빠져죽어라"고 호통을 치셨다"는 것이다.

앞뒤로 앉은 런던특파원들은 또 한바탕 웃었으나 나는 우습다기 보다 내가
또 재무부간부들을 어렵게 만들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부총리의 "한은 해외사무소,필요불가결"발언은 수행기자들이 가십으로
기사화 했고 본점으로부터 잘했다는 격려가 있었다.

70년 5월1일 서진수총재가 돌연 물러나고 김성환은행감독원장이 총재로
취임했다.

서총재께서 나를 조사1부장으로 임명해줬고 대정부 정책건의서 보안
잘못때문에 중앙정보부에서 취조받고 있을때 조기귀가토록 주선해 준대다
런던사무소장으로 보내줬는데 임기전에 퇴임했다는 소식을 접하니 몹시
서운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장학생으로 미국유학갈때는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도와주신 김성환총재의 취임이 반가웠다.

70년 IMF(국제통화기금) IBRD(세계은행)연차총회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때만해도 IMF와 IBRD는 한국의 경제발전에 주요한
역할을 하고있었다. IMF의 한국경제에 관한 평가보고서는 외국상업은행
으로 부터의 차관도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였고 IBRD는 한국의
계획사업에 직접융자를 해주고 있었다.

재무장관이 IMF총회의 수석대표이고 한국은행총재는 교체수석 대표였는데
나는 코펜하겐을 사전답사하라는 본점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기회에 출장일정 1주일과 여름 휴가1주일을 합해서 2주간 예정으로
가족을 데리고 자동차로 유럽여행을 떠났다. 우물쭈물 하다가는
가족들에게 유럽 여행을 시킬수 없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