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수렵채집사회 세계관, 경제민주화
경제민주화가 정치권의 화두다. 약자에 속하는 중소기업, 노동자, 소액주주는 보호·지원하고 자본, 대기업, 대주주 등 강자는 제한해야 한다는 게 경제민주화다. 이 사상의 궁극적 목표는 평등분배다. 그래서 사회주의와 한통속이다.

흥미로운 건 경제민주화의 시장관이다. 국가 개입 없이도 잘 돌아가는 게 시장의 본질임에도 시장은 구조적 악(惡)이기 때문에 국가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게 경제민주화의 인식이다. 예를 들면 경제민주화는 시장 거래를 착취라고 보고 대기업 성장을 협력 업체에 대한 약탈의 결과로 본다. 시장의 핵심은 정합게임이라는 걸 무시한다. 대형마트는 구매자들의 구매욕구·선호에 따른 유통시장의 자율적 분업의 결과임에도 골목상권이나 기웃거린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대주주를 악한 존재로 보고 권한을 대폭 제한하는 상법개정안도 대주주 중심의 지배구조가 경영권에 관심을 둔 대주주와 주가차익을 중시하는 소액주주 간 분업의 결과라는 걸 알지 못한다.

이쯤에서만 보아도 경제민주화 바탕에는 집단주의, 분배평등, 경쟁혐오, 끼리끼리 나눔, 부자에 대한 질투와 의심, 세상을 영합게임으로 보는 관점 등 반(反)시장 정서가 깔려 있다. 주목할 건 반시장 정서의 뿌리다. 인간본능이 그 뿌리이고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회주의자다. 자유와 재산권은 타고난 인권이라는 자연권 사상은 틀렸다고 보는 이유다. 반시장 정신은 후천적으로 배우기 전에 가진 경제에 대한 본능적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흥미롭게도 선천적 경제지식을 ‘민속경제학’이라고도 부른다. 경제학을 배우지 않은 일반인들이 가진 경제지식이다.

왜 본능적 경제지식이 반시장적인가가 흥미롭다. 인간의 정신성향은 생물학적 진화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신생 인류의 본능과 심리적 구조가 형성됐던 원초적 환경이 그 문제의 해답을 제공한다. 그 환경은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 첫째, 원시인의 사회관계는 부족 혈연으로 소규모 집단을 이뤄 지도자의 온정주의적 명령에 따라 수렵채취 생활을 했다. 둘째, 수렵채취자들은 유대감을 갖고 뭉친 사회였다. 생산이란 없었다. 자연이 주는 것에만 의존해 살아야 하는 척박한 경제였다. 한 사람이 더 가지면 다른 사람은 적게 가질 수밖에 없는 ‘영합게임’ 세계였다. 그래서 원시인들은 서로 나눠 먹으면서 애정과 연대로 뭉쳤다.

그런 본능적 가치들은 원시적 석기시대 정신을 반영한 민속경제학이다. 그들은 ‘생물학적 진화’를 거쳐 당시와는 전적으로 색다른 경제적 환경에서 사는 현대인의 본능으로 전달됐다. 그래서 폐쇄된 소규모 사회에 적응됐던 본능적, 유전적 정서에서 볼 때 개인주의, 경쟁, 이윤, 자유, 사적 소유, 소득불평등과 같은 시장사회의 도덕적 가치는 낯설고 부도덕하게 보인다. 예를 들면 경제민주화의 눈에는 이윤은 착취의 결과요, 기업의 성공은 기만, 폭력의 결과로 보인다. 개인주의와 경쟁을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이라고 해석한다. 시장거래와 무역을 영합게임으로, 시장을 약육강식의 장(場)으로 해석하는 것도 경제민주화가 전제한 민속경제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원시인들이 분노했을 자유, 경쟁, 시장거래 등 시장의 도덕적 가치들이야말로 척박하고 야만적인 원시사회를 극복하고 문명화된 풍요로운 거대한 사회를 가능하게 했다. 그런 가치들은 후천적 학습을 의미하는 문화적 진화의 선물이라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시장사회를 소규모 야만적 원시사회로 되돌리는 노력은 도덕의 횡포가 아닐 수 없다. 그 야만적 결과가 사회주의, 나치즘, 군국주의, 파시즘, 민족주의, 보편적 복지 등 지난 세기 동안 인류를 파멸로 이끈 갖가지 전체주의다. 개화되지 못한 원시적 본능에서 나온 경제민주화도 역사를 후퇴시켜 자유와 존엄성을 유린하고 빈곤, 저성장 위기는 물론이요 노예의 길로 가는 길이다. 한국 경제가 불황에 처한 지금이야말로 원시적 본능의 미몽에서 깨어나 시장의 도덕적 가치를 수용할 절호의 기회다.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